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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철학

[논문 정리] 강성훈,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사와 존재사를 구별했는가?: 『명제론』11장을 중심으로

본 글은 논문 『강성훈,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사와 존재사를 구별했는가?: 『명제론』11장을 중심으로, 2013』을 공부한 것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자의적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오류나 왜곡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요약]

1.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제론』과 『범주론』의 구절 사이에는 양립불가능성이 있다.

2. 양립불가능성을 해소하려는 그동안의 시도들은 궁극적으로 "Homer is"에서 'esti(is)'가 정언적 존재개념인 existence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 'esti'가 '살아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Homer is a poet"에서는 'is'가 주어에 부수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einai가 일종의 비정언적 존재개념을 표현한다고 가정할 때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Ⅰ. 들어가는 말

 1. 존 스튜어트 밀의 지적 : be 동사가 존재사로 사용될 때와 계사로 사용될 떄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구의 존재론에 많은 혼란이 야기. 혼동의 연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2. 현대의 고대 그리스 철학 연구자들이 취하는 입장

  1) 전통적인 대응 방식 : 텍스트 구절을 분석하여 사실은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

  2) 일종의 일괄타결 방식

   1] 20세기 중반 이후에 찰스 칸이나 레슬리 브라운 등에 의해서 새롭게 제시됨.

   2] 고대 그리스어 einai의 경우에는 현대 언어인 be 동사의 경우와 달리 존재사의 용법과 계사로서의 용법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

   3] 양자의 명확한 구별을 전제하고서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

 3.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사로서의 einai와 계사로서의 einai를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구절이 있다.

  1) ex. 『명제론』 11, 21a25-8. "Homeros esti poietes" -x-> "Homeros estin"

          『소피스트적 반박』 5, 167a1-2. "to me on esti doxaston" -x-> "to me on estin"

          『분석론 후서』 2권 1장, 『명제론』 3장 등

 2) 두 용법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다면, 밀이 제기하는 것과 같은 비판은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3) 이런 경우, 밀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대응 방식도 견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4. 본고의 목적

  1) 『명제론』 11장의 구절을 중심으로 정말로 양자를 구별했는지 살펴봄.

  2) 그의 작업이 einai의 계사적 용법과 존재사적 용법을 구별하는 작업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

   1] 시대착오라는 칸과 브라운의 생각 공유

   2] einai가 통합성을 가지는 개념이었다는 데에는 생각이 같지만, 그때의 통합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칸이나 브라운, 이들 외에도 독자적으로 통합적 의미 지평을 모색하는 라이크나 백 등과 생각을 달리한다. (강성훈, 2012)

 → einai의 통합성을 공격하는 입장들에 맞서서 칸과 브라운 등과 잠시 연합전선을 펼치는 것 정도


Ⅱ. 있음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 된다

 1. '있음(to on, einai)'이 여러 가지로 이야기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요한 모토 중 하나이다. (to on과 einai의 의미 차이는 박희영, 1995 참조)

  1) 『형이상학』의 여러 구절에서 'einai'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법들을 다양하게 분석하고 구별

  2) 5권 7장, 6권 2장 : 부수적으로(kata sumbebekos) 있음, 그 자체로(kath' hauto) 있음, 범주들 중 하나로 있음, 참으로 있음, 잠재적으로 있음과 현실적으로 있음 등의 구별 (5권 7장 1017a22-b9; 6권 2장 1026a33-b3. Cf. 9권 10장 1051a34-b3.)

  3) 7권 1장, 14권 2장 등 : 범주들 중 하나로 있음에 초점을 맞추어, 있는 것은 범주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해진다고 주장. (7권 1장 1028a10-21; 14권 2장 1089a7-12. Cf. 5권 28장 1024b13-16.)

  4) 4권 2장, 11권 3장 : "있음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지만, 하나와 관련해서 (pros hen) 이야기 된다" → 실체이어서 있음, 실체가 겪는 것(pathe)이어서 있음, 실체로 가는 과정(hodos)이거나, 실체의 소멸, 결여, 성질이어서, 실체를 만들어내는 것이거나 낳는 것이어서, 실체와의 관계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속해서, 혹은 이들 중 어떤 것의 부정이어서 있음 등으로 분류. 이들 모두가 실체와 관련해서 있는 것이라는 주장. (4권 2장, 1003b4-12; 11권 3장 1061a7-10.)

  5) 핵심 구별로 생각하는 것은 범주들의 차이에 따른 구분이며 그 중에서도 실체 범주와 나머지 범주 사이의 구분이다.

   1] 이것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실체-속성 형이상학 확립의 계기가 되며,

   2] 논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주술구조 논리학 확립의 계기가 된다.

 2. be 동사의 용법

  1)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기호 논리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 철학자/논리학자들은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 ①존재(existence) - Zeus is. ②동일성(identity) - Plato is Aristocles. ③계사(copula, predication) - Socartes is pale. ④함축(generic implication) - Man is an animal.

  2) be 동사의 다의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흔히 언급되는 것은 여전히 존재사와 계사의 구별

 3. 그는 einai의 용법 구분과 관련해서 (1과 같이) 다양한 논의를 하면서도 계사로서의 용법과 존재사로서의 용법의 구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 'x esti F (x is F)'로부터 'x esti (x is)'가 따라 나오지 않는 다고 주장하지만, 

     ① 이 두 문장 형식에서 'esti'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나(즉, 존재사와 계사를 구분하지 않았거나),

     ②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차이가 "있음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언급할 만큼 중요성을 갖는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구분했다고 하더라도 그 구분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Ⅲ. 『명제론』과 『범주론』의 양립불가능성

 1. 매우 중요한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x esti F'와 'x esti'에서 'esti'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이것이 바로 그가 존재사와 계사를 구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사정은 그보다 복잡하다. (2.)

 2. 'x esti F'로부터 'x esti'를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도 있다..

  1) 『범주론』 10장. 소크라테스가 있는 경우에는(ontos men Sokratous) '소크라테스가 건강하다'는 명제와 '소크라테스가 아프다'는 명제 중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겠지만, 그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me ontos de) 양쪽이 모두 거짓이라고 이야기한다. (10장, 13b14-18)

  2)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아프다'는 명제가 참인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있다'는 명제도 참이어야 할 것이다. (즉, 'x esti F'라는 형식의 명제로부터 'x esti'라는 형식의 명제가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 아마도 밀 등의 비판은 이런 구절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2. 존재사/계사 구별 여부를 떠나서도, 『범주론』의 이 구절(10장)과 『명제론』("호메로스가 시인이다" -x-> "호메로스가 있다") 등의 구절들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지는 그 자 체로 문젯거리이다.

 3. 이러한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Ⅳ. 『명제론』 11장 : 술어들의 결합에 대해서 논의

 1. 어떤 종류의 술어들은 결합해서 하나의 술어가 되지만 어떤 종류의 술어들은 그렇지 않다.

  1) 예

   1] 가능한 예 : 누군가가 창백하다는 것 + 그가 사람이라는 것 → 그는 창백한 사람이다.

   2] 불가능한 예 : 누군가가 훌륭하다는 것 + 그가 구두장이라는 것 -x-> 그는 훌륭한 구두장이다.

  2) 어떤 경우에 이런 결합이 가능하지 않은가?

   1] 동일한 것에 두 술어가 부수적으로(kata sumbebekos) 서술되는 경우 : 어떤 사람이 창백하고 교양이 있는 경우에 창백함이나 교양이 있음은 모두 그 사람에게 부수적으로 서술됨. → '창백한 교양이 있다' 혹은 '창백하게 교양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2] 하나가 다른 하나에 부수적으로 서술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