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논문 『강성훈,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2에 등장하는 양상문의 역할, 2015』을 공부한 것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자의적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오류나 왜곡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Ⅰ. 파르메니데스의 등장
1.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데에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합의가 있음.
2. 사건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없음.
1) 이후의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가 내린, 'to on'에 대한 규정을 각자 다르게 해석함.
2) 이러한 규정은 맥락-상대적으로 사용된 einai를 정언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파르메니데스가 단편 2에 양상문을 추가한 이유는 그 자신의 작업이 einai를 정언화하는 성격의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볼 때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Ⅱ. 단편 2 해석의 중점
1. 주어의 문제
1) 주어가 특정되어 있지 않다.
2) 독자 고려의 원칙
⇒ 주어를 밝히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목적과 어긋남.
2. esti의 의미
1) 주어가 무엇인지(또한 결합되는 보어나 부사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 주어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는 esti의 뜻을 알 수 없다.
3. 양상문의 사용 : 자신이 사용하는 esti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양상문을 사용
Ⅲ. 파르메니데스가 단편 2에서 드러낸 본뜻
1. 성공적인 사유(noesai)를 위한 탐구의 길
1) 진리(aletheie)?
1] 맥락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직관
2] 진리에 대한 이러한 직관을 파르메니데스가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estin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에서만 aletheie가 성립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 성공적인 사유는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것.
파르메니데스가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정언적으로 사용하던 einai를 정언화하는 작업을 최초로 수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 작업은 가히 비일상적이었을 것이므로 그가 서시에서 가사자/불사자 대비를 통해 비일상성, 초월성을 드러낸 의도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 성공적인 사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즉,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esti의 의미가 고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고정된 의미의 esti와 결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 다음의 문제) : 정언화된 einai
3) '있다'라는 길
1] 고정된 의미에서의 '있음'이란 거기에 '있지 않음'이 섞여있지 않은 것이다.
: 맥락에 따라서 '있음'의 의미가 달라지면, 이것과 결합한 것은 한 맥락에서는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있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ex. 파란 책이 책상 위에 있다)
2] 위와 같은 '있다라는 길'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제시하는 '있다라는 길'이 '있지 않을 수 없다(ouk esti me einai)라는 길', 즉 '있지 않음(me einai)이 없다(ouk esti)라는 길'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그런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4) '있지 않다'라는 길
1] 있음과 있지 않음이 섞여있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순수한 있지 않음을 통해서도 충족된다. : '있지 않음이 필연적인 있지 않은 것'에는 어떤 의미에서의 'esti'도 결합할 수 없다.
2] 하지만 전혀 배움이 없다(panapeuthea). : 알 수도 없고 지적할 수도 없기 때문
⇒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einai, 즉 맥락을 초월해서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einai를 제안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비정언적으로만 사용되던 개념인 einai를 최초로 정언화한 사람이다.
2. 배움이 있는 또 다른 길 - 의견(doxa)
1)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하는 길은 총 3개 : 1] 순수한 있음의 길, 2] 순수한 있지 않음의 길, 3] 있음과 있지 않음이 섞인 길
2) 논란되는 부분인, 단편 8의 7-9행, 16-18행에서의 길은 '있음과 있지 않음이 섞인 길'이다. - 모순율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해석보다 이 해석이 글 전체의 정합성의 측면에서 더 나아 보인다.
3) '파란 책이 책상 위에 있다'는 따위의 진술들로 가득 차 있는 doxa도 배워야 한다. : 진리는 아닐지 몰라도 일상적인 의미에서 참일 수 있기 때문
4)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묘사. 때때로 법칙과 비슷한 일반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기만적이다. (진리가 가지는 필연성과 혼동할 수 있음) 하지만 그러한 혼동을 피한다면 여기서도 배움이 성립할 수 있다.
Ⅳ. 파르메니데스가 정언성을 확보한 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1. 특징만을 이야기하고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2. 어쩌면 진정한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언성을 확보한 것으로서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3. 존재(existence)니 계사(copula)니 하는 것들도 einai가 특정한 방식으로 정언화된 결과물이다.
4. 후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나름대로 einai를 정언화하고 그것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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