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논문 『강성훈, 고대 그리스어 'einai'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비정언적 존재 개념으로서의 '있음'과 'einai' ,2012』을 공부한 것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자의적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오류나 왜곡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Ⅰ. 서로 비껴나 있는 개념 구획 틀
1. 언어를 사용하여 세계를 묘사하는 작업
1) 그 언어의 개념틀을 통해서 주어진 세계를 특정 방식으로 구획하는 일을 전제
2) 서로 다른 언어는 세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획 짓는다.
3) 문제는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개념 구획틀이 비껴나 있는 경우에 발생
ex. arete, kalos, …
2. 영어의 be 동사
1) Mill의 지적 : to be - ① to exist ② to be some specified thing
"Many volumes might be filled with the frivolous speculations concerning the nature of Being(to on, ousia, Ens, Entitas, Essentia, & the like) which have arisen from overlooking this double meaning of the word to be; from supposing that when it signifies to exist, and when it signifies to be some specified thing."
두 말이 같은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서양 철학에서 큰 혼동이 초래되었다는 지적 → 이러한 애매성은 철학적 상식이 됨.
2) 우리말에서는 일상 언어 차원에서 '~이다'와 '있다'의 구분이 있어서 애매성이 발생할 여지 자체가 없다. → 역시 일종의 철학적 상식이 됨.
3) 그렇다면 (20세기 이전의) 'be'와는 '있다', '~이다'가 일대다대응이고, (현대 영어에서의) 'exist'는 '있다'와, 계사로서의 'be'는 '~이다'와 일대일대응인 것인가?
1] 'be'와 '~이다'는 일대일대응이 아니다. → 형용사 서술문
2] 하지만 이 자체로는 두 개념 사이에 개념 구획틀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힘들다. →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함.
4) 보다 중요한 'exist'(또는 'is'가 'exist'의 의미를 가질 때)와 '있다'의 관계이다.
1] 개념 구획틀이 미묘하게 비껴나 있다.
2] 'exist'는 정언적(혹은 무조건적) 개념 / '있다'는 비정언적 개념(비정언적인 existence)
3. 현대 서구학자들은 '있음' 혹은 '비정언적 existence'에 해당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 'einai'에 대한 논의는 혼란에 빠져 있음
Ⅱ. 장소적 계사와 비정언적 존재 개념
: "My son is at home now"에서 'is'가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즉, 영어에도 비정언적 존재 개념이 있지 않은가?)
1. '있다'와 대응 관계가 있긴 하지만 개념 구획틀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을 수도 있다.
ex) 'come'과 '가다'
2. 현대 영어 사용자들은 이런 경우의 'is'를 '장소적 계사(locative copula)'라고 부른다.
1) 계사는 주어와 술어를 연결시켜주고 시제, 성, 수를 표현하는 문법적 기능만 할 뿐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2) 우리말에서의 '있다'가 장소를 연결시키면서 동시에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이 명백하다면, 'is'와 '있다'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3. '장소적 계사'라는 것이 사실 존재함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1) 비교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는 처소 동사와 존재 동사 사이의 연관성이 잘 알려져 있다.
2) 현대 기호 논리학의 세례를 받은 영미 계통의 철학자들이 이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 그들 나름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①존재 개념은 원래 정언적이고, ②비정언적 존재 개념이 개념적으로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③현대 서구인은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논해야 한다.
4. 정언적 존재 개념과 비정언적인 존재 개념
1) 존재(existence) 개념은 원래 정언적이다.
1]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존재(existence)' : '실재 세계에 있음(being in the real world)' (여기서 '있음'은 일단 순수한 장소적 계사로 받아들이자)
2]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 있든 실재 세계에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 특정 장소에 국한해서 (existence로서의) 존재를 주장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 ① "우리 아들은 지금 집에 없다" : 존재 부정 X
② "우리 아들은 지금 집에 있다" : 존재 주장 X - 물론, 존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예가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3] 따라서 '존재(existence)'는 무조건적, 혹은 정언적 개념
→ 어떤 것이 존재하면 그것은 다른 조건과 상관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2) 비정언적 존재 개념은 가능하다.
1] '존재(existence)'가 '실재 세계에 있음'이라면, 존재론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이 실재 세계로 정당하게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이다.
2] 현실 세계(the actual world)가 아닌 세계들도 실재 세계로 간주될 수 있다면, '실재 세계에 있음'이라는 존재 개념이 애초에 가지는 장소적 뉘앙스가 보다 두드러지게 된다.
⇒ 존재 개념의 정언성은 다소 위협을 받게 된다. (세계 상대적인 것으로 이야기할 여지)
3] 세계 상대성에 더해서 '장소에 상대적인 것'으로 존재 개념을 더 상대화하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① '있음' : 장소에 상대적인 존재 개념
"우리 아들은 지금 집에 있다"은 집이라는 장소에 상대적인 것으로서 아들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 : 단적인 존재 개념인 existence를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소에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비정언적 존재 개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기능
② 'there is ~' 구문 : 비정언적 존재 개념과 유사
ex. "There is a boy in this house", "There is no ghost in this house"
3) 영어에는 비정언적 존재 개념이 없다.
1] 'there is ~' 구문에서 장소에 상대화된 존재를 정언적인 존재로 환원시킬 체계적인 방법이 있다. : 부사구 → 술어구로 취급 (마치 "There is a beautiful boy"처럼) (사실 이 부분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사람에게 물어봐야할 것 같다.)
2] (보다 중요한 이유). 'there is ~' 구문에는 비한정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만을 주어로 쓸 수 있다.
① "There is my son at home now"는 불가능
→ 'there is ~' 구문이 비정언적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더라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② 한정적인 대상 표현 : 존재 함축 / 비한정적인 대상 표현 : 존재 함축 X
③ 비정언적인 주장은 존재가 확보된 대상에 대해서도 가능해야 한다.
④ 따라서, 결국 'there is ~' 구문은 주어의 존재를 정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 영미 계통의 철학자들에게는 비정언적 존재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My son is at home now"와 같은 문장에서 'is'를 장소에 상대적인 것으로의 존재 개념을 표현하는 말로 분류하지 않고 계사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Ⅲ. 'einai'와 '있다', 그리고 '~이다'
1. 'einai'는 비정언적 존재 개념을 표현하는 말이다.
1) 엉뚱한 가정 : 철학의 역사가 한국에서 시작되어서 현대 서구어를 쓰는 철학자들이 '있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게 되었다고 가정
→ 그들은 '있다'를 존재사와 계사로 분석했을 것이다.
⇒ '있다'가 비정언적 존재 개념을 표현하는 말이 맞다면 'einai' 또한 그럴 가능성이 있다.
+) 실제로 '있다'나 'einai'에는 철학적 혼란을 가져올 특별한 애매성이 있다고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ex. "신이 있다", "우리 아들이 지금 집에 있다"
2) 비정언적 존재의 일종인 '소유'를 나타내는 데 사용됨
"나에게 아들이 있다.", "A son is to me"(X), "ἔστιν ἐμοὶ υἱός(estin emoi huios)"
1] 영어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문장. "I have a son"으로 써야 한다.
→ 'is'는 단순한 계사여서 독립적인 의미가 없는 허사이기 때문에 나와 관련하여 아들의 존재를 긍정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2] 존재를 나와 관련된 것으로 국한해서 비정언적으로 주장하는 것
3] 고대어들에서는 언어의 발전 과정에서 영어와 같은 형식으로 바뀐 것이 흔한 현상이라고 한다.
김기혁, 『한국어 연구의 이론과 방법』, 보고사, 2010, p.193
"소유와 존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존재의 의미에서 소유의 의미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국어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언어의 발달에서 '그것은 나에게 있다'고 하는 문장의 구성이 먼저 있었고, 후에 '나는 가지고 있다'고 하는 문장의 구성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 반대의 방향으로 진화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 "존재를 표현하는 동사들이 애초에 정언적인 존재로서의 existence가 아니라 비정언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존재사와 계사 사이의 의미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이란, 어쩌면 서구의 언어와 철학의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정언적 존재 개념이 확립되고, 그에 발맞추어 비정언적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 순수한 계사로 기능하도록 변해가는 과정에서야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일지도 모른다."
Kahn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 개념은, 의지적인 신의 개념이 도입된 중세를 거치면서 철학적 반성 작업을 통해서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Kahn(1973)에서는 오늘날 존재 개념과 같은 존재 개념이 이슬람 철학에서 비로소 확립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본고의 저자는 이슬람 철학에서 확립된 것은 정언적 존재 개념일 것이고, 비정언적 존재 개념은 원래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한 정언적 존재 개념이 확립되고 나서 이후 점차로 서구 언어에서 비정언적 존재 개념이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2. '~이다'와 '있다'의 구별 → '있다'와 '~이다'의 구별 자체가 'einai'와 '있다'의 유비를 깨뜨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정체성과 관련한 비정언적 존재 개념)
1) '~이다'는 어원적으로 '있다'의 옛말인 '이시다'에서 왔다고 한다.
('~이다'의 정체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기 때문에, 어원이 '이시다'라는 주장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 '~이다'와 관련된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가장 표준적인 사용인 지정사에 국한해서 논의한다.
2) 어원성 근친성의 정당화 여부와 관계없이, 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는 있다. 김기혁(2006)
1] '~으로 있다' : 일시적이라는 뉘앙스 → 임시적인 직책이나 직업에 대해서 보통 사용
따라서 "그 사람은 한국인으로 있다"와 같이는 사용할 수 없다.
2] '~이다' : 지속적인 정체성. "그 사람은 한국인이다."
3] 국어의 지정문에는 일반적으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뉘앙스가 있다.
4] 주어가 가지는 속성은 통상적으로 '~이다' 구문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한 형용사 서술문을 사용한다.
3) 지속적인 정체성 / 임시적인 정체성
1] 양자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 → 주어와 술어 관계 사이의 연결 강도 차이
2] 양자는 일종의 비정언적 존재 개념
: 정체성(또는 직책)과 관련하여 존재를 비정언적으로 주장
4) 영어와 고대 그리스어의 경우
1] "The man is a teacher"에서 'is'는 단순한 계사이기 때문에 선생이라는 직책과 관련해서 그 남자의 존재를 비정언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볼 이유가 없다.
2] 따라서 "The man is beautiful"과 마찬가지의 주술 관계로 취급할 수 있음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ὁ ἄνθρωπός ἐστι καλός(ho anthrōpos esti kalos)"와 같은 문장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4] 무렐라토스와 네하마스 등의 주장 : einai는 일종의 정체 파악 술어 → "A esti B" = "A의 정체는 바로 B다" (칸의 초기 입장은 남경희(2005))
5] 위의 주장은 "ho anthrōpos esti kalos"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 아름답다는 것이 사람의 속성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정체성이 아름답다는 데 있을 수는 없다. 만약 어떤 것의 정체성이 아름답다는 데 있다면, 그런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자체밖에 없을 것이다.
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사람이라는 데 있다는 것에 주목
⇒ 그 사람은 그 자체로(kath’ hauto)가 아니라 부수적으로(kata sumbebēkos)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② 플라톤은 아름다움 자체의 정체성이 아름다움이라는 데 있다는 것에 주목
⇒ 'kalos'는 아름다움 자체의 이름(onoma)이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이것이 단지 파생적 이름(epōnumia)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6] 위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einai'가 '~으로 있다'나 '~이다'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비정언적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씨름한 철학적 문제들이 왜 문젯거리가 되는지가 잘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다'는 영어의 'is'보다 그리스어의 'einai'와 더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 '~이다'와 '있다'의 구별은 '있다'와 'einai'의 유비를 깨뜨리는 결정적 이유가 되지 못 한다.
Ⅳ. 형용사, 몇사, 그리고 명사류적 계사
1. "ho anthrōpos esti kalos" → "그 사람은 아름다움이다"?
1) 표면적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아름답다는 데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장은 무슨 이유로 자연 언어로서 성립될 수 있었을까?)
2) 그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우리말 문장은 "그 사람은 아름다움이다"
3)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경우 '~이다'를 사용하지 않고, 형용사를 사용해서 "그 사람은 아름답다"라고 이야기 한다.
→ 아무런 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2. 문장을 구성하는 두 성분
1) 우리말
1] 명사를 중심으로 하는 체언 / 동사와 형용사로 이루어진 용언
2] 서술어가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용언
2) 인도유럽어족 언어들
1] 명사와 형용사를 한 편으로 하는 그룹 / 동사를 다른 편으로 하는 그룹
→ 특히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형용사와 명사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2] 서술어가 되는 것은 동사나 동사구
→ 형용사는 명사와 마찬가지로 be 동사(에 해당하는 동사)의 뒤에 와서 동사구를 이루어야지만 서술어로 사용될 수 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어 ῥῆμα(rhēma)가 플라톤의 『크라튈로스』와 『소피스트』에서 '동사'로도, '서술어'로도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에서는 rhēma가 '동사'가 아니라 '서술어'라고만 번역될 수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모든 문장을 S is P 구조로 변형시켜서 술어구에서 동사의 역할을 극소화했기 때문이다. → 서양 철학과 언어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3. 명사류 서술문(nominal sentence) : be 동사 다음에 명사나 형용사가 와서 만들어진 문장
1) (고대 그리스어에서) 형용사는 명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1] 주어 자리에 온 형용사
① 어느 언어든지 주어 성분이 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명사적인 것
② 형용사가 단독으로 주어가 될 수 있다.
③ 따라서, 주어 자리에 온 형용사는 명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2] 술어 자리에 온 형용사
① 명사류 서술문에서 'einai'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비정언적 존재 술어
⇒ 주어 성분과 술어 성분이 일치해야 함.
② 그렇다면, 술어 성분이 되는 것도 명사적인 것
③ 따라서, 술어 자리에 온 형용사는 명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3] 플라톤은 명사와 형용사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이름(onoma)'라고 부른다.
→ 형용사가 원래 명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2) (현대 영어에서) 명사류 서술문에서 술어 자리에 온 명사는 형용사적 성격을 갖는다.
1]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영어의 be동사 → 현대에 와서 술어 자리에 한정 명사(구)가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상실
⇒ 일반적으로는 비한정 명사(구)가 오기 떄문에 명사류 서술문에서 be 동사가 일반적으로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없다.
2] 영어의 명사류 서술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술어 성분이 주어 성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그리스어와 대비되게, 거꾸로 술어 자리에 명사가 와도 그 명사가 형용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ex. "John is a man" : 존이 사람에 해당하는 성질을 갖는다는 의미 (나중에 영미권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
3] 이러한 경향성은 20세기에 기호 논리학이 등장하고, 학교에서 가르쳐지면서 가속화
4] 한정 명사(구)와 비한정 명사(구)/형용사의 구별이 중요하게 됨. → 동일성의 is와 술어의 is 사이의 구별과 상응
3) 한국어의 경우
1] 명사류 서술문에서 술어 자리에 오는 것은 특별히 어느 쪽으로의 경향성을 가질 이유가 없다. (∵ 술어 자리에 명사가 오는 것과 형용사가 오는 것은 구문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
2] 우리말의 형용사 서술문은 그리스어의 명사화 경향성을 수용할 능력이 없다.
⇒ 우리말의 형용사가 동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있다'와 'einai'의 유비에 궁극적인 한계를 제공한다.
Ⅴ. 'einai'의 애매성과 철학적 문제들
(출처 : 강성훈, 고대 그리스어 'einai'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비정언적 존재 개념으로서의 '있음'과 'einai' ,2012)
1. 형용사 서술문을 배제하면 그리스어 'einai'는 우리말의 '있다'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
2. 정언적 존재(existence)는 비정언적 존재의 (한 종류의) 극한값이다.
→ '한 종류의' : 비정언적 존재 개념이 정언화되어서 나올 수 있는 개념이 existence만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같은 것도 비정언적 존재 개념으로서의 'einai'가 existence와 다른 방식으로 정언화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3. 철학적인 혼란을 야기할 만한 종류의 애매성을 가지고 있는가?
1) 다의성이 있다는 것은 물론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다의성이 철학적인 혼란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는가?
2) 본 논문의 입장은 "텍스트의 맥락이 사실은 그러한 애매성이 문제가 되는 맥락이 아니다.(그리고 애매성이 문제가 되는 맥락으로 파악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라는 것
3) 존재적 의미와 술어적 의미 사이의 애매성?
1] 존 스튜어트 밀의 지적 :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큰 혼란"
2] 현대 서구어에서는 순수한 계사로서의 'be'와 'exist'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구별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3] 하지만 'einai'는 'be'와 달리 '있다'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 '있다'라는 말이 철학적으로 심각한 문젯거리를 야기할 만한 애매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어 'einai'도 마찬가지이다.
4] 『국가』 5권의 사례 :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 추해보이기도 한다는 사실로부터 이들은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하다는 추론
① "A esti B"와 "A ouk esti B"로부터 "B esti"와 "B ouk esti"가 추론 가능
② 이 경우 'einai'의 애매성은 철학적으로 문제되는 종류의 애매성이 아니다.
4) 동일성의 의미와 술어적 의미 사이의 애매성?
1] 칸 : 동일성 문장은 일반 술어 문장의 논리적으로 특수한 경우일 따름이고 언어학적으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 "A is B", "B is A" 모두 참일 때 "A is B"가 동일성 문장일 따름)
2] 애초에 러셀은 양자의 언어학적 차이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했던 것
"서술(Predication)이나 동일성(Identity)처럼 완전히 서로 다른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같은 단어 'is'를 사용하는 것은 인류에게 불명예이다"
① 작업의 기본 성격 : 언어의 문법적 구조와 논리적 구조가 불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문법적인 구조보다 논리적인 구조를 밝히는 것
② "A is B"라는 문장은 A와 B가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전혀 다른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
⇒ 동일성의 is와 계사의 is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
(이 부분은 잘 이해가 안 간다. '언어학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러셀의 작업에 대해 좀 더 공부해봐야겠다.)
3] 'einai'가 비정언적 존재 개념이라고 하면, "A esti B" 문장이 A와 B가 동일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전혀 다른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 "A esti B"가 참인 경우, ① A와 B가 동일한 것을 지칭하면 "B가 A로 있다"는 문장도 참이고, ② 지칭하지 않으면 "B가 A로 있다"는 문장은 거짓이 될 따름이다.
⇒ 서로 다른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단순히 사실적인 차이만을 갖는 것이다.
∴ 1. 작업의 궁극적 의의는 텍스트를 살펴볼 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안내 도구 제공
2. 언어적 문제의 해결이 철학적 문제의 해결은 아니지만, 언어적 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철학적 문제의 정체가 분명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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