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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

서민우, 실험 공동체의 탄생, 2016

서민우, 실험 공동체의 탄생, 『21세기 교양, 과학기술과 사회』 中, 2016, pp.25-38



보일(1627~91)과 홉스(1588~1679)의 논쟁은 결국 보일의 승리로 이르게 되었다. 이 논쟁을 승리자인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홉스의 반발은 정치철학자의 월권행위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장에서 논쟁을 다시 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질서를 재건하려는 지적 투쟁 :

17세기 전반에 발발한 30년전쟁(1618~48)은 유럽을 "완전한 고갈"로 몰고 갔다. 지식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치유한 지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따라서 확실한 지식이나 보편 언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뒤를 이었다. 

잉글랜드는 30년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내전과 청교도혁명을 거치며 당대 유럽의 위기를 함께 겪었다. 그에 따라 왕정복고기의 잉글랜드 지식인들은 정치적 당파주의, 종교적 분파주의, 철학적 급진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불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려고 했다. 

▷ 토마스 홉스, 확실한 연역적 철학체계 구축 :

그는 『물체론』에서 진정한 철학의 가치를 "참혹한 재난들……, 즉 살육, 고독, 결핍의 뿌리인 내전"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았다. 그 모범은 자명한 공리와 정의에서 출발하며 의심할 수 없는 결론을 도출하는 기하학이었다. 그는 기하학을 본받아 확실한 논증적 철학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논쟁을 사라질 것이고, 그 결과 내전의 참혹한 재난들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로버트 보일 : 

그를 비롯한 왕립학회 회원들 역시 사회적 갈등과 지식의 관계를 예민하게 인식했다. 하지만 홉스와 달리 이론의 여지가 있는 문제 자체를 논의에서 제외하려 했다. 자명한 '사실'과 사실에 대한 '해석'을 구별하고, '사실'에만 집중함으로써 공통의 대화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사실적 지식과 보일의 실험 공동체 : 

홉스와 보일 모두 사적 판단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개인주의에 반대했다. 그것이 정치적 무질서로 이어지는 혼란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일과 같은 실험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통일하기 위해 어느 편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보다는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는 공동체를 건립함으로써 그 내부에서 안전한 토론을 벌이는 쪽을 선호했다. 서로 다른 의견이 교환되는 가운데서도 평화와 조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 제안이었다.

▷ 실험 공동체의 규칙 :

첫째, 무엇이 적합한 토론의 대상인가? - 자명한 사실을 확립할 수 없는 인간사(교회와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 자체를 삼가려 했다. 그들의 토론은 오직 자연에 관한 것에 국한되었다. 더욱이 자연의 문제에 대해서도 오직 직접 목격이나 신뢰할 만한 직접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 지식만이 수용의 대상이었다. 

둘째, 토론자들은 어떤 예의를 갖춰야 하는가? - 원인 설명을 추구한다는 빌미로 각종 형이상학적 가설을 제기하며 격한 논쟁을 벌이는 일은 예의 규범을 벗어나는 행태로 간주했다. 형이상학은 사실의 영역을 벗어나므로 불확실했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루될 수 있었다. 실험 공동체 내에 정치를 위한 공간은 없어야 했다.

▷ '비정치적 공간' 실험실 :

실험주의자들에게 새로이 태동하던 실험실이란 공간은 자명한 사실적 지식이 생산되는 '비정치적 공간'의 상징이었다. (보일은 공기펌프를 사용한 '진공'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실험실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을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실험실은 실험 공동체의 규범을 준수하는 이들에 의해 생산 과정이 자유롭게 목격될 수 있는 모범적인 공적 공간이었다. 또한 목격자 역시 사적 이해관계에 초연한 '비정치적 인물들'로 여겨졌기에 신뢰할 수 있었다. 실험 공동체는 왕정복고기 잉글랜드 사회가 바라던 이상적 정치제의 모범으로 선전되었다. 정치제는 실험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실을 사실로 수용함으로써 안전한 대화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홉스 : 확실한 인과적 지식과 리바이어던

홉스가 보기에 정치를 배제한다는 실험철학자들의 대안은 불확실한 믿음과 목격에 바탕을 둔 위험천만인 프로젝트였다. 진정한 철학이란 자연철학과 사회철학을 분리하지 않고 일관되게 설명하는 일원적인 인과적 지식으로서, 절대적인 확실성과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식은 철학의 제1원리(세계의 근본 실체는 물질)로부터 연역해낸 완벽한 논증적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더욱이 그에게 자연철학작와 사회철학자의 방법론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한 역할 분담은 분란의 불씨에 불과했다.

개별적 사실만 집적하는 보일의 실험철학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도, 사실의 원인을 알려주는 인과적 지식의 원천도 아니었다. 실험은 현상에서 원인을 추정하는, 자연의 실제 작용에 관해 그저 개연적인 이해만 제공하는 활동이었다. 공기펌프 또한 공기가 누입되는 등 여러모로 불완전했다. 따라서 감각할 수도 없고 실험철학자들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진공의 존재를 철학에 도입하여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보일에게 진공이란 공기펌프에 만들어진 조작가능한 '인공적 현상' 정도를 의미했다.)

홉스가 생각하는 진정한 철학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험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규범을 강요하며 홉스와 같은 철학자들을 배제했다. 이는 그들 역시 다른 집단처럼 또 다른 전문가 집단에 불과함을 의미했다. 그들이 모범으로 내세운 실험실 역시 공동체의 규범에 동의한 이들에게만 문을 열어주었다. 홉스에게 철학이란 특정 이해관계를 가진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일 수 없었다.

철학의 공간 역시 안정과 평화를 위해 리바이어던 같은 절대적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이 지도자는 국가의 정치적 지도자와 하나였다.


보일의 승리 : 열린 과학? 

극단적 개인주의의 폐해뿐만이 아니라 압제적인 일원적 전제주의의 혈흔도 생생한 왕정복고기의 잉글랜드 사회는 홉스 식의 리바이어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일을 위시한 실험철학자들은 완벽한 확실성을 강박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어떠한 독단적 권위도 부인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험철학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실험적 지식은 참된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관용적인 종교와 균형 잡힌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왕립학회가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실현한 이상적 공간으로서 잉글랜드 사회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당시 성직자들, 법조인들에게 핵심 화두로 떠올랐던 '목격'(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목격의 신뢰도를 판별할 방법, 유죄 선고와 관련된 목격의 신뢰성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안정적 처방을 제시함으로써 그들과 동맹을 맺은 것은 실험철학의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처럼 실험과학 자체가 사회적 시험의 대상인 시대에 실험과학을 정당화하는 일은 실험적 증거 이상의 '정치'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보일과 홉스는 지식과 정치적 조직의 문제를 함께 사고했다는 점에서 자연과학자이자 정치철학자였다. 

▷ 홉스의 타당한 비판 : 실험실은 열린 듯하면서도 닫힌 위계적 공간

첫째, 보일은 과학적 지식이 정치와 무관한 객관적 지식임을 주장하며 정치를 과학 외부로 내쫓았으나, 이후 과학은 정치 외부에 위치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그 어떤 지식보다도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역할 분담은 분란의 불씨에 불과)

둘째, 공공에게 열려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공간은 현실적으로 접근이 통제되며, 공간 내부의 '정치'는 외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회원의 대부분은 신사 계층이거나 귀족 계층이었다. 오늘날 계층 차이는 거의 사라졌으나, 과학적 전문성과 민주적 통치의 긴장은 여전하다. (규범에 동의하는 이에게만 열린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