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S

Jan Golinski, Making Natural Knowledge: The Place of Production

Chapter 3. The Place of Production


The Workshop of Nature : 실험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실험실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이며, 실험 기관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이러한 경계가 어떻게 자원이 모이도록 통제했고, 모인 후에는 어떻게 보호했는가? 실험실 바깥 세상과의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물리적인 현장이 행위자를 어떻게 구속했는가? 자연지식이 만들어지는 다른 장소와 실험실의 차이점은 무엇이 있는가?

실험실과 자연지식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장소가 이 장의 주제.

역사가들의 작업 리뷰. 그들의 작업(자연과학은 국지적인 지식)이 담고 있는 함의 평가.


과학에 대한 "everywhere and nowhere" 관점 : 과학의 타당성은 보편적으로 확장되지만, 그것의 발흥지는 특별히 어느 곳에도 없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첫 번째 관점(everywhere)을 타파하기 위해 실험실 연구에서부터 바깥 방향으로, 과학 지식이 효력을 발휘하는 더 넓은 지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 보편성은 신성한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

실험식 연구는 두 번째 관점(nowhere)에 대한 연구. 전통적으로 자연지식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러한 전통은 사회와의 고립을 원하는 학자들의 태도에 의해 강화됨. 하지만 고립 또한 하나의 사회적인 행동.


<고립 또한 사회적인 행동>

의도적인 고립이 과학적 작업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함. (Issac Newton, Charles Darwin) : 

첫째, 뉴턴은 고립된 삶을 선택했고, 동시대인들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에드몬드 헬리는 고립된 곳과 바깥 세상을 연결하는 산파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그는 연금술 연구를 하기도 했는데, 매우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또한 통속적인 것과의 구분은 뉴턴의 수학적 자연철학 연구에도 내재되어 있다. 그는 전문적 집단 외의 대중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빛의 합성에 대한 실험은, 그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재연이나 목격자는 불필요했다. 뉴턴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난해한 수학이나 신학적 문제를 풀기 위한 조건으로서 고립을 보이면서, 명백히 그 고립을 사용했다. 대중은 모르겠지만, 동료 과학자들도 그의 고립을 진리를 좇는 상으로 받아들였을까? 상대적으로 반대항에 있는 보일과 후크는 뉴턴의 이러한 고립적인 행동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둘째, 다윈의 고립은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것(고대의 전통)으로도, 사회적인 압력(자연 선택의 진화 개념에 대한)에 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사회와 단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서신을 교류하기도 했고, 기타 외적인 활동도 했다.


고립은 비사회적이지 않다. 비난을 피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혜택.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에 적합하다는 이미지.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 또한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 몫했다?


<실험실이 공식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과정>

17세기 이후로 실험실이 지식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장소라고 여겨짐. 실험실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두 군데에 모두 걸쳐있음. 둘 사이를 이동하는 수단이 요구됨. 실험을 위해 격리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적. 그곳에서 만들어진 지식이 보편적으로 성립한다는 점에서 공적. 

근원에서부터 이미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연금술이 행해진 곳이 그 근원. 2세기 동안 고정관념이 지속. 

이러한 고정관념은 실험으로 얻은 지식을 공적인 것으로 만드려는 이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르네상스기를 거치며 기술자들에 의한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베이컨과 스프라트같은 이들은 실험 지식을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세웠다. 왕립 학회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험의 증언자(철학회보의 독자, 토론자, 투고자, 응답자, 현상 보고자, 청중 등)로서 역할. 결국 실험이 공적인 활동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왕립학회의 실험 지식의 인정에 대한 비판도 있었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홉스는 왕립 학회를 공적인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음. 그는 학회 소속이 될 수 없었는데, 이를 실험 지식의 생산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둘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들과의 이해관계 충돌.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몇 가지 대책이 받아들여졌다. 구두 설명과 시각적인 이미지가 실험실의 컨텐츠와 그 결과물을 드러내기 위해 유통되었다. 실험실 접근을 규제하는 절차도 형성되었다. (보일은 그의 거주지에 실험실을 만들고 사적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사적인 지위를 인정하거나 적절한 소개서를 가져온 사람의 입장은 허용했다. 반면에 후크의 실험실은 동료들의 검증을 받기 쉬웠고, 외부인을 받지 못했다.)

보일과 후크는 특정한 공간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인정을 활용했다. 그리고 공간의 물질적인 재배치를 통해 실험실을 창조할 수 있었다. 



<과학 기관의 건축물에 대한 연구>

외부인들은 과학 시설에 외경심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과학 시설의 건축물 때문이다. 

Sophie Forgan은 19세기 과학자 공동체와 대학 실험실, 박물관의 건축물에 대해서 연구. 건축물의 형태는 실용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상징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후자는 장소의 선정, 건축물의 재료, 접근 수단, 설비의 내부 배치 등에 의해서 나타난다. 

실험실의 내부 배치에 대해 연구하면서 Forgan은 또한 19세기의 공간적 차원에서의 규율 형성에 대해 주목한다.

역사가들은 실험실에서의 직무가 조직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서 연구하기도 한다. 지위의 구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역할이 다름. 서로 다른 역할들은 또한 더욱 미묘한 코드에 의해서 강화됨. (복장, 젠더 등)



Beyond the Laboratory Walls

실험실은 언제나 외부 영역과 관계를 맺는다.

첫째, 외부의 지원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둘째, 실험실은 특정한 종류의 환경적 영향(자격이 없는 방문자, 물리적인 간섭)과 분리되어야 한다.

셋째,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지식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외부 세계로 빠져 나간다. (예컨대, 실험 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