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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고대철학, 제2장 아티카의 철학 -Ⅱ. 플라톤 (1)

플라톤

그는 청년 시절에 이미 공공생활에 관여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404년경 30인 참주 독재, 그 뒤 일년 간의 민주주의자들의 통치, 그리고 특히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판결을 경험하고 나서 그는 철학을 하는 데 온 생애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철학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기를 원함과 동시에, 개인적인 생활이나 공적인 생활에 있어서 선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는 소피스트들과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략 390년과 388년 사이에 여행을 한다. 도중에 타렌트를 방문하는데, 거기서 아르퀴타스와 친교를 맺으면서 피타고라스주의와 마주치게 된다. 이 사상은 그의 모든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영혼선재설, 교육론, 윤리적 · 정치적인 여러 견해, 종말론적인 신화 및 특히 그의 아카데메이아의 학문과 생활형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절대로 순수하게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철학적인 국가의 이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367년경 디오니시오스 2세를 만나러 시칠리아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이 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17세의 나이로 아카데메이아에 입문한 해이기도 하다.)

저작 문제와 관련해서, 힐쉬베르거는 저작들을 연대순으로 상당히 정확하게 배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성훈 교수는 후기의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는 일부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학자들의 추정이므로 단순히 그렇게 믿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A. 선(善)

플라톤의 철학은 소크라테스가 중단했던 선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윤리적인 문제를 가치의 문제로 제기했던 소크라테스의 문제 설정을 넘겨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가치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규정해야 할까? 소크라테스가 남겨 놓은 설명은 '앎'이라는 것이다. 

a) 앎(지식)

윤리적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단순히 앎 속에 있는 것일까? 플라톤이 권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덕(arete)에 관한 앎은, 일종의 평범한 '원리에 대한 요청(petitio principi)'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삼는 대화편들이 그의 회의적인 아포리아(aporia)로 끝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계속해서 연구하도록 자극을 주는 심리적인 긴장상태가 아니라, 그에게 소크라테스적인 시기, 즉 윤리적인 선(좋음)의 본질문제에 대한 대답이 불충분한 시기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도처에서 앎과 능력이 그저 항상 선이라고 하는 주장을 부정한다. 


b) 목적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지식 자체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이다. 앎과 능력을 나쁜 것 또는 좋은 것이라고 평가할 때에는, 마음가짐(ethos)가 끼여들게 마련이다. 이 마음가짐은 의지의 태도이고, 마음가짐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의지가 향하고 있는 목표와 목적에 달려 있다. 목적이 선하면 마음가짐과 앎도 선하다. 그는 "영혼의 눈"으로 선을 알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올바른 태도는 가질 수 있으나, 이때 덕(훌륭함)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기준은 다시 주체 안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문제 전체가 우선은 '어떠한 목적인가?'하는 물음에 걸려 있다. 그는 『에우튀데모스』에서 지식과 능력이 반드시 그것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 그 어떤 것(ti)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때 이 지식과 능력 자체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어떤 것이 1) 어떤 종류의 목표이며, 2) 왜 이 목표들이 선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은 밝혀지지 않는다.


c) 에로스(eros)

▷ 뤼시스 : 

『뤼시스』에서는 문제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만약 모든 가치(philon: 중성 정관사 to와 함께 쓰일 경우 '좋아함의 대상' 즉 '좋아하는 것')가 본성적으로 어떤 다른 것에 매달려 있고, 이 어떤 것이 또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다른 목표 때문에 그 가치로서의 특성을 갖게 되고, 이렇게 계속된다면, 마침내 우리는 최고로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proton philon: 으뜸으로 좋아하는(친애하는) 것)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들이 다 매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가치의 원리 또는 근거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가치관계의 모든 연쇄가 아무런 가치도 없고 그 뜻을 잃게 된다. 이를 통해서 플라톤이 밝히는 것은, '가치의 선청성'이다. 이것은 먼저 최고의 가치에 타당하며, 동시에 거기서 이끌어 내어지는 모든 다른 가치들에도 타당하다.

박종현 교수는 "proton philon"이 궁극적 원리(arche)로서의 '좋음(to agathon)'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실로 친애하는 것은 이른바 이들 모든 친애들(philiai)이 거기로 종결되는 것인 바로 그런 것'(220b)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심포지온(향연) : 

선은 모든 인간적인 가치들에 비해 선천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관과 주관의 성향과도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향연』에서 제시된다. 여기서 플라톤은 철학적인 가치문제를 에로스 개념과 결부시켜 해명하고 있다. 인간은 에로스 속에서 아름다움과 선을 붙드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이 인간에게 공통된 고유한 것이고, 원형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선이라고 보는 것이 자명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에로스를 긍정하지 않고, 근원적인 미와 선에 관여하고 그럼으로써 그 스스로도 가치 있는 것으로 되는 그런 에로스를 긍정하고 있다. 이 근원적인 미는 "곡 한 가지 모양의 선"(선? 아름다움과 좋음의 차이는 무엇인가?)으로서 완전히 자체 속에만 머물러 있다. 따라서 윤리적인 선은 시장가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윤리는 객관적이고 규범적인 것이다. 선은 인간의 본래적인 본성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작용을 미치며 "좋은 것'으로 보이며 의무로서만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일단 위에서 제기한 두 물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1) 어떤 종류의 목표인가? -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것.

2) 왜 이 목표들이 선이어야만 하는가? -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d) 존재

▷ 국가에 있어서의 존재와 선

선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아직 밝혀져지 않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국가의 영도 전체가 "그 자체로 선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며 그것을 끝까지 밝히려고 했지만, 선의 이데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우리들은 선이 어떠한 영향력을 펼쳐나가는가 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간접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비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태양의 비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어서는 선의 이데아가, 존재자가 인식되고, 또 존재자가 현존재(Dasein)와 본질을 갖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 자체는 이미 존재가 아니며 존재 저 편에 있다. (이 이유는 무엇일까? 박종현 교수는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를 궁극적인 원리(arche)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윤리적인 문제가 형이상학적인 관찰방법으로 넘어간다. 많은 존재들 속에서 많은 선들이 번뜩이게 된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선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들은 우선 학문에 있어서 존재의 풍부함을 파악하고, 이러한 진리들 속에서 가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들이 모든 원리들을 내포하는 최고의 원리 속에서 가치들을 총체적으로 꿰뚫어볼 때에는, 존재의 최고근거 속에서 동시에 모든 가치들의 원천을 붙들게 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은 이제 하나의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무한히 풍부한 이데아론이 된다.


▷ 가치 형이상학의 전제들

이러한 사상은 존재의 근거가 바로 원천적인 바탕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직관 (연쇄관계를 생각하라) 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 직관의 배후에는 존재 자체가 좋다는 보다 깊은 전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존재론이 존재를 목적론적인 사고형식에 끼워 넣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모든 형상(eidos)들이 "~때문에 있는 것", 즉 목적인이고 따라서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이란 목적에 관계되는 것과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에게는 하나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이 목적원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들은 플라톤의 형상목적론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런 존재론적인 사고형식이 생기게 된 것은, 원래부터 존재론적인 문제에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뤼시스』의 윤리적인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 그곳에서는 목적론적인 가치의 단계질서가 전개되고 있다. 그 전체적인 사슬은 하나의 최고 가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런데 이 형상에 대한 목적론적인 해석은 보편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존재론 자체에도 타당하다. 이렇게 해서 존재의 최고원리와 따라서 존재 전체가 선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가 이러한 개념의 세계를 만든 이후부터 모든 구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 신이 좋다고 인정함과 동시에 존재 자체도 좋다고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전재가 다 좋은 것인가? 자연적인(물리적인) 악(malum physicum)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모든 실재들의 근원인 존재의 원리가 동시에 악의 원리는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한 가지 모습의 좋음"은 없는 것이 아닐까?


▷ 존재의 중점

그러나 전반적인 고대철학이 존재에 관해서 말할 땐, 오직 이상적인 존재만 볼 뿐, 악이란 있지 않은 것(비존재자)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이상에 중점을 두는 존재관의 창시자다. 후세에 와서 악을 일종의 결여(privatio)라고 말하는 것도, 출처를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플라톤의 존재론을 전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플라톤 자신도 아직은 자신의 존재론이 이미 선천적으로 가치의 원리(목적론적인 가치의 단계질서?)에 의해서 결정되고, 따라서 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좋음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이상적인 존재, 즉 가치의 원리에 의해서 이미 나눠져 있는 존재다. 이 말은, 좋음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를 구별하는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이미 실천이성의 우위를 볼 수가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좋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우선 존재와 진리를 거쳐가게 되어 있다.


e) 쾌락

▷ 쾌락주의에 관한 노년기의 대화

그는 윤리적인 문제를 형이상학 분야로 끌어올렸지만, 순수한 윤리적-현상학적(현상학적???)인 문제권을 벗어난 일이 없다. 그는 노년기의 대화편에서 감각주의를 다루고 있다. 문제되고 있는 것은, 좋음이 쾌락과 동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토론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아리스티포스와 크니도스의 에우독수스(Eudoxus von Knidos)의 견해였던 것 같다. 

에우독수스는 첫째로 개념을 밝힌다. 쾌락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주체 속에 순전히 개인적으로 생기는 욕망과 욕구에서, 또 이것들이 충족되는 데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좋음이란 어떤 사람이 요구하는 것 자체다. 가치란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의 마음에 드는 것에 의해서 생긴다. 아리스티포스 또한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는 프로타고라스의 인식론적인 감각론과 병행하는 일종의 가치론을 주장하고 있다.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는 순수한 개인적인 감정이 문제될 뿐이다. 한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에게 가치가 있다. 그의 체험은 그에게 있어서는 직접적으로 현재적인 것이다. 


▷ 플라톤의 비판

플라톤은 쾌락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쾌락과 사랑이 삶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쾌락을 윤리적인 원리로 삼은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는 키니콬스학파에 반대해서 기쁨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와 소위 모든 종류의 행복주의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이 학설들은 모든 가치의 근원과 본질은 전적으로 쾌락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반론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로, 주관적 · 순간적 · 감각적인 느낌이 가치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뒤에 와서 사실 가치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참된 쾌락과 거짓된 쾌락을 구분할 수 있다.

둘째로, 쾌락은 일종의 아페이론(apeiron)이며, 따라서 "보다 많음"과 "보다 적음"을 허용한다. 따라서 한 가지 뜻만 가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쾌락이라고 보이는 것이 쾌락이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셋째로, 쾌락은 생성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참된 좋음은 존재의 영역에 속한다. (이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 쾌락의 질서

따라서 쾌락이 우리들의 삶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이 쾌락은 절제, 올바름, 이성 및 통찰에 의해서 질서지워지고 통제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필레보스』의 최종 결론이다. 이 말은 쾌락이 좋음의 원리가 아니라 좋음에 따라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원리는 미적인 쾌감이나 개인의 윤리생활, 그리고 국가생활에 있어서도 똑같다.


f) 악

▷ 악이라는 문제의 성격

좋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이와 대등하게 나쁨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아야 한다. 악(나쁨)은 자연적(물리적)인 악(malum physicum)과 윤리적인 악(malum morale)이라는 두 가지의 뜻으로 나누어 진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악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그는 오로지 긍정적인 것에만 편드는 사람이어서 부정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주의는 악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철학체계 속에서는 악에 대한 범주가 없다. 그가 참되고 진짜 존재라고 했던 존재는 이상적인 존재일 뿐이다. 


▷ 악에 관한 원리?

그래서 가치에 반대되는 것은 존재라고 헤아려지지도 않고, 일종의 현실이긴 하지만 옳은,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악이라는 말 대신에 결여(privatio)라는 말을 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결여란, 존재하고 있어야 할 것과는 약간 다른 어떤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념적인 파악에만 들어맞는 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세계에는 가치에 반대되는 것이 있는 것일까? 그의 대답은 윤리적인 악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자연적인 악의 원인은 볼 수 있는 세계의 유한성에 있다.

힐쉬베르거는 그가 나쁜 세계영혼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는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플라톤주의의 한계

그러나 악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한 현실이며, 이러한 사실이 플라톤의 철학에 끼어들기 어렵다는 건 한 가지의 결점이다.



B. 참된 것(진리)

우리는 참된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할 때에만 이데아론에 접근할 수 있다.

a) 진리의 개념

진리는 우리들의 생각과 말의 성질일 수 있다. 이것이 논리적인 진리다. 이러한 진리란 판단과, 판단이 재현하려는 사태(진상)가 내용적으로 일치되는 데에 있다.

또한 진리란 존재자의 성질일 수도 있다. 만약 존재자가 있어야 할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참(진리)이다. 이러한 진리는 존재론적인 진리이다. 플라톤 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존재론적인 진리개념 뿐이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기 때문에 참된 존재가 아닌 한 "존재자"와 참된 존재를 일관적으로 구분하긴 한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존재자"는 완전히 그의 생각에 떠오르지 않고, 이데아 자체가 참된 것이다. 이런 참된 것이 존재론적인 진리다. 

진리개념의 두 가지 뜻을 위해 전제되고 있는 것은, 참인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직관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진리는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의 진리개념을 위한 역사적인 바탕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보편개념,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영원히 정지해있는 존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한 이유는 첫째로 수학적인 학문의 이상 때문이다. 다른 보다 더 깊은 한 가지 이유는 윤리학의 선천적인 가치내용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신의 자기이해에 있다. 정신은 "항상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을 정신의 사고진행을 지배하는 근본법칙이라고 보며, 참된 것의 본질이라고 보기도 한다.

 

b) 진리의 원천

▷ 감각적인 것

그가 맨 먼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진리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 우선 감각적인 것은 원천에서 제거한다. 이때, 감각적인 것은 주관적인 감관의 지각임과 동시에 감각의 객관적인 세계(물체의 세계)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지각에는 한결같은 인식이 없고, 따라서 진리가 없다. 그래서 『파이돈』에서는 철학자가 자신의 육체와 감각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밖에도 헤라클레이토스학파의 주장처럼 감각의 세계는 생성의 세계이며, 따라서 감각의 세계에서는 진리와 학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끝으로, 플라톤에게 있어서 감각은 인식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인 지각들은 우리들에 의해서 비교되고 총괄되는데, 이때 공통적인 어떤 것이 추출된다. 이것이 우리가 판단하면서 인식할 때의 "있다"고 하는 진술이라고 생각되며, 학문과 진리의 대상이 된다. 


▷ 정신

진리의 원천은 영혼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혼이 적어도 그 자체로만 고찰을 할 때는, 영원히 존재하며 똑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것과는 동류의 것이므로, 언제나 이것과 함께 지내게 된다. 따라서 헤맴도 멈추고, 그것들 가까이에서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게 된다. 이러한 혼의 상태가 지혜(phronesis)라 불린다. (『파이돈』, 79d)

선천주의 : 정신은 본성적으로 항상 이 진리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다. (원래부터 동일한 것, 큰 것, 선한 것, 정의로운 것, ... ) 이러한 본질적인 것 자체에 관한 지식은 인간 안에 깃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 자체를 플라톤은 '개념, 사상, 알려져 있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간단히 '이데아(idea)'라고도 했다. 이데아는 생득적인 것이다.

상기 : 영혼이 신들 곁에 있을 때는 순수한 사상을 모두 보았으나, 이제는 감각적인 지각을 통해 자극을 받음으로써 이 순수한 사상을 상기(anamnesis)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상은 그전부터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천성의 개념이다. 동시에, 플라톤은 이 개념을 이상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모든 존재자들을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원형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미리 보았다"는 플라톤의 말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되며, 그가 정신이 선천적 · 원형적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은, 진리인식과 가치인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적인 것을 넘어서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아와 상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 나중에 보충할 것.

선천주의의 밑바탕 : 이념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의 선천성을 근거지우려는 플라톤의 시도는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는 『파이돈』에서 『메논』에서보다 더 근원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에서 생기지 않은 정신적인 내용을 애초부터 감각적인 지각에다 들여보내지 않고, 또 이 정신적인 내용을 응용하지 않고서는 감각적인 지각을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사성 자체의 이데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두 개의 나무를 비교하여 종합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인식 전체의 근본개념이다.이것은 추상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동일성, 유사성, 다양성 등을 알고 있지 못하면 추상의 과정 자체를 시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것의 유효 범위 : 모든 인식의 근본개념만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그 자체"인 모든 것, 따라서 모든 원형적인 개념인 아름다움 자체, 정의 자체 및 모든 본질적인 것들은 선천적으로 정신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서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재인식됨으로써만 인식된다. 즉, 플라톤에게는 시공간의 감각의 세계 전체가 이데아와 순수한 개념 속에 받아들여지며, 거기에서부터 이해된다. 

유물론에 대한 반대 : 그는 모든 인식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프로타고라스의 학설과, 물질적인 감각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안티스테네스의 주장과, 모든 가치감정은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하다는 아리스티포스의 명제에 반대하는 것이다. 감각과 욕망이라는 가장 주관적인 경향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비감각적이며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범주 없이는 절대 있을 수 없다. 이런 범주가 없이는 감각주의와 가치주관주의도 지탱될 수 없다. 또 더 나아가서는 정신의 내용, 사고모형 및 이데올로기가 모두 상대적이라고 해도, 정신은 역시 모든 상대성을 초월한 선천적인 근본개념들로서의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 감성과 사고

감성과 사고의 관계는 더 정확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는 합리론자요 관념론자였지만 감각적인 것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감관의 이용 : 주의할 것은, 감각은 경험의 소재를 제공하고 정신은 스스로의 선천적인 요소를 통해 이 소재를 정돈함으로써 경험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형식이나 기능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정하게 한정되어 있는 몇 가지의 근본기능(범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수의 개념들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모든 본질에 관한 지식은 선천적이라서 아무 것도 질서지워질 필요가 없다. 인식의 내용은 그저 의식되기만 하면 되는데, 물론 의식은 감각을 통해서, 오직 감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모습은 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용을 의식하도록 일깨워 줄 뿐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감각적인 것 전체가 모사의 성격을 갖게 된다. 우리들은 이제 모든 감각적인 지각을 그들을 있게 해 준 원래의 모습에다 관련지우지 않으면 안 된다.


관여와 원형 : 플라톤은 이런 관련을 '관여(methexis)'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관여는 실제로는 원형(paradeigma)과 동일한 것을 뜻한다. 오직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관여라는 말을 감성이 내재하고 있는 이데아라고 이해해서도 안 되고, 원형이라는 말을 감성을 초월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된다. 이데아가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다 초월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의 양태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이런 두 가지 개념들의 인식적-이론적인 의미는 경험적, 시공간적인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인식은 일종의 "유비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원형적인 개념에 관계됨으로써 감각적인 지각을 읽어내는 것이다.

존재와 가치를 꿰뚫어보게 해준다는 유비는 공통적인 것에 이르는 추상이 아니라, 모든 감각적인 개체들이 관여하고 있는 형상을 바탕으로 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 형상(eidos)가 로고스(logos: 아마도 저자는 '원리'라는 뜻으로 로고스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아마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용어인 것 같은데, 나중에 찾아봐야 겠다. 아 참, 파이돈 99d에 '로고스'에 대한 주석이 있긴 하다. 테아이테토스에서와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참고할 것.)이며, 이 로고스가 비로소 지각을 본질인식과 가치인식이 되도록 해준다. 모든 인식인 "로고스를 통해서" 생기며, "유비적"인 인식이다.

'관여', '나타나 있게 됨', '결합' 에 대해서는 『파이돈』, 100b~100d 참조.

유비 : 우리들은 이제 '존재유비론(analigia entis)'의 시발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 학설은 순수한 플라톤주의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가장 많이 존재하는 것과 가장 참된 것이 모든 존재자와 참된 것의 원인이다" 이 명제는 이데아론에 나오는 하나의 전형적인 명제이다.

인식을 위한 감각적인 것의 역할이 제한됨에도 불구하고―감각은 원인(causa)이 아니라, 기회(occasio)에 불과하다―관여, 원형, 및 유비는 역시 감각적인 것과 정신을 결합시켜 놓은 것을 뜻하며, 또 생겨난 것과 생겨나게 하는것(안히포테톤(anhypotheton: 무전제인 것))이 합쳐진 것을 뜻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 세계가 아니고, 실제적으로는 양태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과 칸트 : 둘을 비교하면 배울 것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선천적인 요인들을 고려했는데, 칸트에게 있어서는 형식만 선천적인데 반해서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내용도 선천적이다. 또한 칸트에게 있어서는 인식내용이 뒤에 생기나, 플라톤에 있어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내용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도 미리부터 완성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항상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며 점차 그 내용을 파악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감각이 인식내용을 위한 자료를 제공해준다고 여겼으나, 플라톤은 내용을 위해서는 쓸모도 없다고 생각했다.


▷ 독사(doxa)

인간의 인식이 이데아로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감각적인 직관 자체에만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라 억설(doxa: 억견, 의견)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변화하는 영역에서는 영원히 동일한 명제들과 진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참된 사태를 직접적으로 꿰뚫어보지 못하는 데 그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우연히나 신의 으농에 의해서 참된 것에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논증관계를 알지 못할 때에는, 이 참된 것도 옳은 앎이 아니라 우연히 미루어서 안 것이다. 


c) 진리의 대상 ― 이데아

플라톤은 진리의 원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 대상의 세계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이데아의 사실 

플라톤은 그 자체로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여러 대상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사고의 내용도 변화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 대상들은 한 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떤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신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데아는 두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한 가지의 사상(주관적인 이데아)이다. 둘째로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대상(객관적인 이데아)이다. 우리들이 진리의 근원에 관해서 말할 때는 전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고, 진리의 대상에 관해 말할 때는 후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정확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데아는 정신에 의해 산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스 사람은 "대상"을 항상 현실적이고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정말로 정신에다 마주 세웠다. 특히 그때그때마다의 사고에만 맞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에다 맞세운다. 그래서 플라톤의 이데아도 역시 실재적인 것이며, 우리는 이 이데아를 미리부터 존재하면서 관조한다는 바탕 위에서, 참된 인식의 영원히 변치 않는 대상으로서 순수한 사고(nous)에 나타나는 현실이라고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가 'idea'인 것이다)


▷ 속성(성질)

우선 우리들은 이데아가 어떠한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알아두어야 한다. 이 실재성이 감각적, 시간 공간적인 현실(res extensa)의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심리적인 현실(res cogitans)도 아니다. 이데아의 실재성은 오히려 일종의 관념적인 실재성이다. 관념적인 실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수학과 논리학의 '타당관련'을 다룰 때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다. 수학적인 명제는 세계의 어떠한 권력을 가지고도 취소할 수 없다. 이 명제들은 절대로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이전의 명제"인 것이다.


▷ 예지의 세계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이 관념적인 현실(실재성)이 어떠한 현실보다 강하다. 물질적인 세계는 언젠가는 지나가 버리지만, 관념적인 명제는 언제까지라도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어떤 영원한 것, 즉 시간이 없는 어떤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데아는 스스로는 세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는 세계의 최고의 설계도다. 이데아는 존재자의 존재(esse)이다.

이데아 세계의 실재적인 성격 : 그래서 플라톤은 관념적인 현실을 본래적인 현실, 즉 존재자 중의 존재자라고 본다. 관념만이 완전하고 참되고 본래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동식물과 무생물은 관념을 구현할 수 없는 반면, 관념을 모사하려 애쓴다. 하지만 순수한 가치와 본질 자체에는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완전히 구현될 수 없게 풍부한 생산적인 여러 효능 때문에, 이데아의 세계는 보다 더 강한 현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구별하고, 전자만을 참되고 본래적인 세계로 보고, 후자를 존재와 무의 한복판에 있는 모상이라고만 본다. 


두 개의 세계? :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강한 현실을 '이세계설'의 뜻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에게는 존재의 통일도 있다. 그는 이 하나의 존재를 여러 가지 양상, 즉 모상으로서의 존재, 자연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존재, 이데아적인 존재 등으로 나눈다. 그는 이데아적인 존재가 보다 강한 현실이며, 이것이 "나타남으로써" 다른 존재들이 존재를 갖게 되며 존재에 관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것은 정신이 스스로 경험하는 데서 알게 된다. 이러한 자기경험이라는 말 대신에, 중세기의 사람들은 "원리를 소유하는 상태(habitus principiorum)", 또는 "신의 빛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데아론이란 양태(또는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만약 지성(nous)이 감각적인 직관과 다른 것이라면, 지성에 맞서있는 존재, 즉 사유적-형상적인 존재는 확실하고 참된 존재이다. (이 문장은 박종현 교수의 관점과 비슷하다) 플라톤은 존재의 이러한 양태를 존재자에서 발견했고, 이것을 끄집어 내서 "이데아"라고 일컬었다. 이런 것이 그의 양태에 관한 분석이며, 또 "분리(chorismos)"라고 하는 것이다.


이데아계의 내용 : 플라톤은 처음에는 그 자체로서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등 윤리적-미적인 이데아들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파이돈』에서는 논리적-존재론적인 관계들에 관한 이데아들(같은 것, 다른 것, 대립), 마침내는 모든 본질적인 것들 전체의 이데아들이 나와 있다. 이렇게 해서 이데아론은 존재의 모든 영역, 나아가서 자연과 예술에까지도 넓혀져 나갔다.

악마의 이데아? : 이렇게 되고 나면, 막스 쉘러(M. Scheler)가 말한 것처럼, 악마(satan)의 이데아도 인정되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악마의 이데아도 이데아계에 알맞으며, 결국 좋음의 이데아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플라톤의 사고구조는 오직 완전히 정해진 한 가지의 존재만을 염두해 두고 있다. 그런데 이 한 가지의 존재란 참되고 좋은 것으로서 가려내진 존재이다. 이러한 '있어야 할 것'에 비춰보자면, 악마는 밤과 어두움의 현실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도 존재와 무의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에, 아직은 현실이기는 하나 이미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전락한 것도 아직은 역시 존재를 전제로 삼고 있는 한, 아직 이데아적인 어떤 것이다.


▷ 학문의 세계

▷ 동굴의 비유

존재의 양상

참된 존재!

히포테시스

▷ 절대자

이데아의 이데아

후세의 철학사에 미친 영향

▷ 변증법

논리적인 측면

형이상학적인 의미

▷ 하나와 많음

▷ 이데아의 여러 가지 의미

개념

실체

이상, 원형

원인

목적

▷ 수로서의 이데아

관념의 수

일자와 이원

플라톤과 피타고라스학파

수학적인 수

▷ 이데아론의 발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 코리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