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아'의 복권
1. 범주에 대한 비판
1) 오직 12개의 범주만을 가지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는 확실한 만큼이나 공허하다.
2) 판단의 범주나 원리는 자아(주체)의 활동과정의 산물이다.
2. (특히 그가 주목하는 지점인) 칸트철학의 인식론적 문제점
1) '사물 자체'
1] 사물 자체는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① 사물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② 이로 인해 칸트 철학 체계의 부정합성이 나타난다. → 사물 자체와 현상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합성과 모순이 나타난다.
2] 이론적으로도 대상과 주체의 동일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① 둘 간의 심연은 결코 메워질 수 없기 때문
2) '선험적 주체' 역시 근본적이지 않다.
1] 선험적 주체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다는 건, 선험적 주체에 대해서 인식하고 판단하며 말하는 또 다른 주체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결국 칸트 철학 체계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설명될 수 없다.
3. 피히테가 마주한 두 가지 문제
1) 사물 자체와 현상, 대상과 주체를 어떻게 하면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 자아와 비아(非我)를 어떻게 통일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2) 선험적 주체보다 더 근본적인, 경험적인 조건에 전혀 제약되지 않기에 설명될 수 없는 '자아'를 어떻게 얘기해야 할 것인가
4. 피히테의 해결 방법
1) 자아와 비아를,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우고 통일시키는 원리를 '자아'로서 정립한다.
2) '자아' : 직접적으론 경험되지도 않고 인식되지도 않으나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워주는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결과를 통해서만 스스로 드러낼 뿐인 이 원리를 피히테는 '자아'라고 한다. (비아와 함께 짝을 이루는 자아와 다른 것으로, 일종의 절대자라 볼 수 있다.)
3) 이러한 자아의 활동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연구에서 핵심이며, 이런 점에서 '지식학'이란 "자신의 본질적인 통일성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서술하는 지(知)"이다.
Ⅱ. 피히테의 철학적 테제
1. 첫째 테제 : "경험 등 모든 사실의 설명에 근거가 되는 이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 자신 안에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 '자아의 정립(定立)'
1)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근거이다. 경험이나 인식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아인 것.
2) 이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다른 근거는 필요없다.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자아는 존재한다. 그리고 자아는 자신의 단순한 '존재함'에 의하여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3) 이 절대적 자아는 연관들을 정립하는 판단작용이며 정신의 활동이다.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2. 둘째 테제 : "자아는 비아를 반정립한다. 나아가 자아는 비아를 자기 안에서 반정립한다." (자아는 비아를 자기에 대립되는 것으로 세운다(反定立))→ '자아의 부정-비아의 정립'
1) 자아는 정신적 활동인데, 어떠한 활동도 대상이 있어야 한다.
2) 어떤 대상을 정립하려면 정신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대상이 자아 안에 이미 놓여 있어야 한다") → 자아의 부정이라는 성격을 갖기에 '비아'라고 한다.
3. 셋째 테제 : "자아는 자아 안에서 가분적 자아에 대해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한다."
1) 절대적 자아는 자아와 비아로 나뉘어 존재하게 되었는데, 셋째 테제는 이처럼 나뉠 수 있는 자아(가분적 자아)와 나뉠 수 있는 비아가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2) 경험하는 의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바로 여기서부터.
3) 이 테제는 마주 서 있는(반정립된) 자아와 비아의 종합(Synthese)을 표현한다.
4) 이 대립에 의해 자아도 비아도 구별을 획득하고, 이 구별을 통해 내용을 획득한다.
5) 여기서 비아는 대상이 갖는 다양성을 대변하고, 반대로 자아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나와 관계지우기에 통일성을 대변한다.
⇒ 결국 피히테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한 절대적 자아란, 활동을 통해 자아와 비아를 동시에 정립하는 '자아'이다.
4. 칸트처럼 선험적 철학을 발전시키는 작업
1) 그러나 선험적 주체가 아닌 '자아'에서 출발한다.
2) 피히테에게 인식의 '대상'이란 비아일 뿐이고, 자아 외부에 있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칸트의 사물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3) 모든 대상은 '자아' 안에 있고, 자아와 통일되어 있다. 이 통일만이 절대적이다.
4) 자아는 비아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것이기에, 비아에 의해 제약된다.
⇒ 자아가 사용하는 범주나 원리는 칸트 생각처럼 초역사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된다.
5. 자아의 무제한적인 자유
1) '자아는 무한을 향한 행동자' → 극도로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2) 도덕적 질서는 완전성을 추구하는 자아의 노력 속에 있으며, 이 도덕적인 질서야말로 신적인 질서이다.
3) 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 무한한 자아들이 서로 부딪치고 상충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4) 사회에 의한 통제의 이념적인 견해를 제출 → 전체가 조화로울 수 있도록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
Ⅲ. 자아철학의 봉쇄장치
1. 선험적 기획의 연장선
1) 선험적 주체를 발견하려는 칸트의 기획을 좀더 근원으로 밀고 가려고 했다.
2) 칸트의 선험적 자아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의 무규정적 자아에서 출발 (칸트의 선험적 주체조차 거기에 의존해야 하는 '자아'의 존재에서 출발) → Ⅰ-2-2)
3) 근대철학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있음 그 자체가 '자명한', 존재로서의 자아.
2. 절대적 '자아'
1) 자아는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어주는 활동이다. 즉, 주체와 대상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전체이다. → 이런 점에서 '절대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2)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나'(자아)를 절대화하여 절대자의 자리를 부여한다.
3) 근대적 자아를 신의 자리로 밀어올림으로써 칸트에 의해 재건된 근대철학이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음을 선언하는 셈
4) 이로써 근대적 주체철학은 새로이 '자아의 신학'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 신학 안에서 모든 것은 자아의 소산이며, 자아활동의 결과물이다. → '주관적 관념론'
3. 모든 대상은 자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내부에 있다.
1)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아 안에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
2) 사물 자체가 일으키는 난점은 물론,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확인하고 보증할 수 있는가라는 난문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Ⅰ-2-1)
4.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
1) '자아' 안에서 자아에 의해 비아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비아를 자아가 옳게 인식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2) 나아가, 하나의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것으로 정립하는 두 자아가 있다면, 두 자아가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 인정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3) 많은 자아들이 모두 자기의 대상을 반정립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부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 진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
5. 더욱 근원적인 장애
1) 진리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해결하는 데서 뚫고 나가야 할 장애는 '차이'와 '불일치'를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2) 주체와 대상은 '자아' 안에서 절대적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차이와 불일치는 사고될 여지가 없다.
3) 불일치를 사고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사고할 수도 없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판단과 다른 사실이나 대상을 주목함으로써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
4) 피히테의 철학으로는 다수 지식의 대립과 충돌, 그것을 통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 그 결과로서 새로운 지식의 출현이라는 중요한 사태를 이해하기 곤란해진다.
⇒ 진리를 아예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보장하려다 보니 실제로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지식의 변화와 발전을 이해할 여지를 스스로 봉쇄해 버린 것이다. (딜레마가 해결된 대신 사상적인 봉쇄가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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