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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고대철학,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 Ⅲ.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

여태까지 시작(근본질료)과 끝(사물을 지금 있는 그대로 있게 해주는 것, 즉 형상)은 고찰되었으나, 과도기(중간단계) 즉 생성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았다. 흔히 두 명제를 대립시킨다. 생성, 곧 운동이 모든 것이며, 여태까지 존재자라고 보여져온 것들도 생성과 운동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 그리고 생성과 운동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있지 않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 저자도 마찬가지로 둘을 대립시킨다. 이렇게 단순히 대립시켜 정리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본다.


A.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544-484)

a)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

▷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 :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근본사상으로서 만물은 흐르며, 아무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명제를 전해준다. '영원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 세계의 참된 본질이다. 원리(arche)란 어떤 사물이 아니라, '생성'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arche'라는 용어를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진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arche'의 용례는 '시작'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편 B103 "원의 둘레에서 시작과 끝은 공통이다" 뿐이다.) "이 세계란, 정도(metra)에 따라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었으며,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불이란, 영원한 움직임, 특히 그 정도에 따라 조종되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 불은 '세계이성(logos: 로고스)'의 상징이기도 하다.


▷ 대립 : 

생성은 항상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저자의 해석에 의하면,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는 뜻의 생성이 아니라, "대립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또한 서로 다투는 것들끼리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조화를 이루게 하는 비율 또한 로고스에 의한 것이다.


▷ 로고스 : 

그렇다면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는 여러 가지 다른 것들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영원한 생성 속에서 불이 붙었다가 꺼지는 정도이고, 신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 신의 법칙은 모든 것을 다스리며 인간의 법률도 여기서 나온다. 또 그에게 로고스는 신이기도 하다. 그에게는(탈레스와 그의 계승자들 처럼) 아직도 신적인 것이 영원히 생성되고 있는 모든 것들과 일치한다. 하지만 로고스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정신은 아니며, 내재적인 생성의 법칙이다.

양호영(2005)을 참고하자.


b) 헤라클레이토스의 상대주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모든 것들이 다 흐르고 있다면 학문도 진리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반대한다. 그렇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유명론자(nominalist)였던 걸까? 그러나 진짜 유명론자는 크라틸로스 같은 헤라클레이토스학파의 사람들 뿐이다. 이들은 보편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로 절대적인 생성만을 인정한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다르다. 그는 만물이 흐른다고 하면서도, 항상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조화, 즉 법칙과 로고스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학문이 충분히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헤라클레이토스학파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는 이제 그를 파르메니데스에 대립시키면서, 파르메니데스가 그가 제기한 문제들을 고려하는 도중에 그 유명한 '정지한 존재자' 이론을 생각해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 엘레아학파

a)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570-475)

크세노파네스는 이오니아의 콜로폰 출신이지만, 방랑 생활 끝에 엘레아에 정착한다. 그는 신화의 여러 신들이 인간의 모습이나 비유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꿰뚫어본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비판적인 종교철학이다. 그 첫 번째 성과는 다신교를 극복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은 유일한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종교는 일신교인가? 저자는 크세노파네스의 말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면, 현대적인 의미의 일신교가 아니라 범신론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해주는 단편 A30) 또한 저자는 그를 파르메니데스와 연관 짓는다. 어떻게?

강철웅(2012) 참고. 그는 신학 단편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 향연시 단편을 분석하여 크세노파네스의 메타 담론적 논의에 주목한다. 파르메니데스가 크세노파네스의 메타 담론의 방식을 계승한 것이 아닐까?


b)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40-470)

파르메니데스는 순수한 엘레아 출신이며, 이 도시국가(polis)에다 국법을 제정해 주었다. 

강철웅(2012)은 파르메니데스의 입법에 그의 존재론과 잘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 이 문제를 다룬 논문을 출간하지 않은 모양이다.

헤라클레이토스와의 관계는 이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저자는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에서 늙은 파르메니데스를 젊은 소크라테스와 만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대체로 동시대에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진리로의 길 :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특징짓는 것으로서 세 가지의 명제가 있다. 

1) "사람들은 항상 오직 존재자만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그와 반대로 무(있지 않은 것)는 없다." - 단순한 동어반복이나 논리학의 동일률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존재론에 대한 반박이다. 저자는 파르메니데스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 속에서의 생성'을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길"로 파악한 것으로부터 이 명제가 연유했다고 생각한다. (단편 선집에서는 "... 그리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의(panton) 길이 되돌아가는 길이다"로 번역하고 있다. '근원'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이 구절을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하는 것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아직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가 이 명제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생성은 없고 존재만 있다고 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명제에서 "존재자"라는 말을 강조하고, 이것을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성은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는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있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사고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원초적인 사고는 존재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사고이다. 이런 사고는, 항상 자기 자신과 같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동일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발전이나 시간 같은 것이 없다는 점에서 존재적인 동일성을 내포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반대하는 것인데, 이 대립은 존재개념을 이렇게 원초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즉, 저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이 유명한 언명이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왜 이러한 원초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을까? 존재를 항상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p.43 에서 "추상을 하려고 하는 열광"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는 왜 그렇게 극단적인 추상을 하려고 하는가?)또한 그가 파르메니데스에 대해서 전통적인 입장('einai'를 존재한다는 의미의 '있다'로 해석하고, 그 주어에 '있는 것(존재자)'를 넣어야 한다는 입장)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는 점 또한 유의해야 할 것이다.


2) "사고와 존재는 동일하다." - 저자는 이 명제를 인간의 건전한 이해력의 바탕 위에서 실재론적인 인식론을 표명한 것이라고 본다. 이 이해력에 따르면, 우리의 사고는 대상의 세계를 묘사(또는 규정)한 것이고, 사고가 대상을 반영하는 한에서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이원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고의 내용과 사태가 일치하는 것을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이원론이다. 이 명제의 배후에는 형이상학적인 확신이 감춰져 있다. 형이상학적 확신이란 사고와 존재는 동등하며, 헤라클레이토스학파가 믿었으리라 생각되는 바와 같이, 영원히 흐르고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도식으로 굳어진 개념에서 흘러나온다는 확신이다. 로고스는 존재적인 것 안에서, 자기와 맞서는(대응하는) 것을 갖는다. 

강성훈(2015)과 단편선집 참조.


3) "서로 연관이 되어 있는 존재가 있다. 이런 존재는 하나요 모든 것이다." - 존재 전체가 하나요, 보편적이요, 항상 도처에서 동일한 것이다. 변화하지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생멸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생성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고 저자가 말한다. "그것이 생겨났으면, (지금은) 있지를 않으며, 그것이 미래에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역시 (지금은) 있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성은 사라지며, 소멸을 자취를 감춘다." 이 말은 과거부터 말장난이나 논쟁술의 말버릇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원초적인 사고와 관련이 있다. 원초적인 사고에 따르면 존재는 항상 동일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즉 늘 그것으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생성이나 소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생멸을 시인한다면, 그때 말하고 있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고 따라서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그것은 어떤 다른 것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 모순이 한층 더 분명해진다. 아낙사고라스가 이와 같은 어려움에 부딪혔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결여라는 개념을 끌어들이고 가능태와 현실태를 구분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적인 인식과 이성적(지성적)인 인식을 구분하고, 사고가 진리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해석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사고'는 '추상을 하려는 사고'이다. 즉 추상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저자는 추상을 해서 얻은 모든 개념들이 원래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현실에서 인위적으로 고정화하고 도식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또 자신의 개념이 세계를 진짜 세계 그 자체로 보았기 때문에, 로고스의 세계를 실재와 혼동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편,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인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다. 이처럼 본질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 안에서 찾아야 한다면, 어떤 보편자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종 속에서 일까, 유 속에서 일까? 또는 정도가 더 높은 보편자 속에서 일까? 저자가 해석하기를,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것의 본질이든지 "존재자"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실체(ousia)와 제2실체를 구분하고, 존재란 일의적으로가 아니라 유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존재개념에 대한 학설을 통해서, 존재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이 다양한 존재들간에 비교를 할 수 있게 한다.


▷ 억견으로의 길 :

파르메니데스는 억견으로 나아가는 길을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하고 있다. 억견은 이성적인 인식이 아니라 감각적인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계의 생성과 다수성은 감각을 바탕으로 해서 생긴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사실은 망상이요 공상이라고 해석한다.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계가 있다. 전통적인 견해 중에서 하나 정도로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파르메니데스의 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은 강성훈(2015)의 논의를 토대로 하고 있다.


▷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 :

둘의 대립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해볼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학문적인 진리는 그것이 참된 진리인 한, 영원히 동일한 진리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학문적인 진리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흐른다고 꿰뚫어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사고의 세계이며,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는 감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 해석과 관련된 문제는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의 뒤를 이은 학파들 사이의 판국의 해석과 직결되므로 매우 중요하다이를테면, 거스리(1960)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있는 것은 있고없는 것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함으로써엘레아학파와 원자론자를 대립시킨다이와 관련된 문제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 중이다.


c) 제논(Zenon, 460)

엘레아의 철학은 제논에 의해서 변증법이나 논쟁술이라 불리는 그 전형적인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 운동을 부정하는 증명 

운동은 없고 오직 정지한 하나의 존재만 있다고 하는 파르메니데스의 학설을 기초지으려고 한다운동을 부정하는 네 가지의 유명한 증명을 가지고 시도한다.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1) 운동을 할 때 우리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은 불가능하다모든 구간들은 연장된 것으로서 무한히 많은 작은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앞서 있는 거북이에게까지 가는 동안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데거북이도 그 시간만큼 더 가기 때문이다.

3)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화살은 매 순간마다 공간의 일정한 부분에 있는 것인데순간적으로 어떤 장소에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원래 정지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그리고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는 무한히 많은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화살은 움직이고 있지 않다. (단편 선집 참고)

4) 모든 운동은 환각이다두 물체가 같은 속력으로 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또 다른 물체를 지날 때와 서로를 지날 때 속력이 다르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 변증법 

경험할 수 있는 현실과 비교했을 때이 증명들은 역설적(paradox)이다아리스토텔레스가 제논을 변증법의 발명자라고 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변증법은 논쟁술(eristike)이다.


▷ 제논의 전제 조건들 

그러나 제논은 궤변으로 사기를 칠 의도는 없었고자신의 원초적인 존재개념그리고 사실에 의해서라기보다 말에 의해서 더 잘 알려져 있는 존재개념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여러 전제 조건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 사상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이기도 하다따라서 논리적인 영역과 실재적인 영역이 혼동되고 있다.

2) 존재자에 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당장 그 존재의 궁극적이고 실재적인 크기만 생각되었다(뭔 말이여 이거???)

3) 제논에게 있어서 존재자는 그 자체 안에 정지되어 있고그 자체로부터만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의 토막이며우리는 이 토막들을 직접 지각할 수 있다그들은 사고가 서로 다른 간접적인 수단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존재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제논의 네 번째 운동 부정 증명에 대한 비판인 것 같다첫 번째 문장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엘레아학파는 항상 모사설을 전제로 삼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고또한 여기에서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도 독자적인 법칙을 지니고 있으며이 정신이 존재의 일정한 측면과 계기밖에 파악해 내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으며정신은 존재를 간접적으로밖에 규정할 수 없으며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앞질러 가버려 현실과 동떨어진 순수한 생각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엘레아학파에 대해서는 김주일(2002) 참조. 그는 술어적 입장에서 파르메니데스와 그 이후의 철학을 해석한다. 그는 "존재적으로 ... 이해하게 되면 파르메니데스 이후에 나오는 다원론과 원자론을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충격과 그에 대한 반감 정도로만 해석하게 된다. 다원론자들 및 원자론자들이 기본적인 실재는 생멸하지 않는다는 점만 받아들이고, 실재의 수를 하나에서 여럿으로 바꿈으로써 '현상을 구제'한다는 설명은 어중간한 절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다원론자와 원자론자들은 파르메니데스를 오해했거나 무시했거나 혹은 불성실하게 이해한 꼴밖에 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