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론자들과 아낙사고라스
저자는 기계론자들과 아낙사고라스의 작업을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의 대립을 화해하려는 시도로 해석하고 있다.
A. 기계론자들
이들에게는 한 가지 새로운 계기가 나타난다. ‘기계적’인 것 이라는 사상이다. 이 사상의 근원은 엠페도클레스, 레우키포스 및 데모크리토스 등이다.
a)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492-432)
그는 시칠리아 섬 출신으로, 기이한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정화를 주장하는 종교의 사제요 신비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순회설교자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또 정치가, 의사, 시인인 동시에 학자이기도 했다.
▷ 원소 : 그가 첫 번째로 제기한 문제도 역시 원리(arche) 문제이다. 그는 밀레토스학파와 반대로 네 가지 근본적인 실체(불, 물, 공기, 흙)를 주장한다(존재의 네 가지 “뿌리(rizhomata)”) 이 뿌리들이 서로 결합하며 모든 것들이 생성된다. 그러나 뿌리들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 않는다. 그는 네 뿌리 안에 어떤 신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원리의 요소들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존재의 뿌리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원소’ 개념으로 남아있고, 세계의 궁극적인 구성요소가 영원하다고 하는 그의 생각은 오늘날 ‘물질보존의 법칙’으로 남아있다.
▷사랑과 미움 : 그는 질료에 어떠한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초적인 실체들은 어떻게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두 가지 원초적인 힘, 즉 사랑(philotes)와 미움(neikos)을 도입하여 그 운동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물활론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보다 더 옳게 해석하자면 인간적-정신적인 삶의 개념들을 바탕으로 해서 존재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 기계론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에서처럼 무비판적인 의인관은 아니다. 혼합과 분리는 존재 그 자체인 법칙에 의해서 생긴다. 따라서 스스로 생기고,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 세계형성 : 세계의 네 가지 대(大)시기가 서로 규칙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엠페도클레스가 세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할 때, 소용돌이를 사용하여 설명한다는 것과 자연적으로 발샹했다는 것, 그리고 형태가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 영혼의 세계 : 영혼이나 정신은 원래 신들 곁에 있었지만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다시 정화되어 육체에서 풀려나 저 세상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윤회를 하게 된다. 이것은 오르페우스적 • 피타고라스적 생각이다. 즉, 엠페도클레스의 사고의 폭은 굉장히 커서, 오르페우스교의 신비와 이오니아의 자연학과 더 나아가 기계론적인 자연학까지를 동시에 포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인식 : 그의 인식론의 핵심은, 우리들은 항상 같은 것을 통해서 같은 것을 안다는 사상이다. 이 생각은, 철학이 항상 거듭해서 정신의 범주와 존재의 범주가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당장 밝혀진다. (아마도 정신과 존재의 일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역시 그 배후에는 사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엠페도클레스의 사고가 분명히 엘레아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을 종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엘레아학파의 철학에서 얻은 것은 생멸하지 않고 질적으로 변하지도 않는 존재, 즉 원소가 있다는 학설이다.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서 얻은 것은 생성을 결정하는 끊임없는 혼합과 분리라고 하는 사상이다. 새로운 점은 생성을 규칙적이고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하는 시도이다.
b) 레우키포스(Leukippos)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460-370)
데모크리토스에게서는 모든 것을 다 연구하려는 포괄적인 정신이 엿보인다. 하지만 모든 저작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현재 일부만 알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유물론자였다. 그는 인과관계를 발견하는 것을 매우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에서 그는 영혼의 평온함을 찾았다.
▷ 존재 :
1) 원자 : 데모크리토스의 기본 사상은 원자에 관한 이론이다. 그에게 있어서도, 질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는 한 가지 모양의 존재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파르메니데스의 하나 뿐인 존재를, 더 이상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원자”라 불리는 궁극적이고 작은 분자로 분해시킨다. 원자는 그 수가 무한하며, 질(質)이 없다. 그러나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서로 다르게 배열하므로써 순수히 양적인 계기에 의해서 사물들 사이의 차이가 설명될 수 있다.
그는 존재의 여러 가지 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파르메니데스와 의견을 같이 한다. 존재는 그 질에 있어서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와는 반대로 양이나 장소의 이동과 같은 차이를 인정한다.
따라서 감각적인 지각은 주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감각의 성질은 자연의 원문을 우리의 주관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감각기관의 활동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양의 차이(연장, 형태, 질량, 무게, 딱딱함)에 관해서는 감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physis)이다.
2) 공간 : 원자의 이론에는 텅 빈 공간의 개념도 속한다. 존재 사이에는 있지 않은 것, 즉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 있다. 데모크리토스에게는 이 공간이 원자와 똑같이 필연적이다. “어떤 것(있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있지 않은 것)보다 더 있지 않다.”
3) 운동 : 그가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이 운동의 개념이다. 원자들은 텅 빈 공간에서, 영원하고 강제적으로(즉 압력과 충돌에 의해서) 그리고 자동적으로 운동한다. 자연은 이제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신들로 가득 차있는 것이 아니고, 엠페도클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 비유되는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고 물체와 운동만을 가지고 있다.
4) 인과적 • 기계론적인 자연관 :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자동적’이라는 말이 ‘우연’을 뜻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물체와 그 안에 깃든 법칙에 의해서 엄격하게 인과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물체와 공간, 운동은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에, 인과론적인 결정론의 바탕 위에서 세계에서 생긴 모든 것들을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소위 계량적-기계론적인 자연관찰의 길을 연 것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자론자들이 운동의 근원을 밝히기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운동은 영원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운동의 근거를 밝힐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기계론적인 인과관계만이 인과관계의 전체인지 물을 수 있다.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원인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마지막으로 그들이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요소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인식 : 그러나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고도 매한가지로 원자의 운동이다. 감각적인 인식 또한 그렇다. 즉 대상으로부터 조그만 상(eidola)들이 떨어져 나와 감각기관에 흘러 들어가서 영혼의 원자와 마주침으로써 감각적인 인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감각적인 인식과 정신적인 인식의 차이는 오직 단계적인 차이일 뿐이다. 여기에서 유물론이 분명히 드러난다.
▷ 윤리학 : 좋음(훌륭함, 선)이란 결국 유쾌함(쾌활)이다. 그의 쾌활은 근본적으로는 일종의 쾌락주의적인 개념이다. 이후 에피쿠로스학파는그의 쾌락주의를 계승 • 발전시킨다. 모든 사고와 마찬가지로 모든 감정도 원자의 운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유물론을 보게 되는데, 이 윤리학은 원자론과 일맥상통한다.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전체가 하나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모습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힐쉬베르거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데모크리토스의 실천적인 생활규칙은 좋음에 대한 이론적인 원리인 ‘쾌락’과는, 즉 원자론과 일맥상통하는 윤리학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데모크리토스는 단순한 쾌락이 아닌 “유쾌함”을 말하고 있는데, “유쾌함은 적절한 즐거움과 균형있는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라도 생각해볼 문제로 남겨두어야겠다. 어디에선가, 그의 원자론이 이러한 ‘유쾌함’을 포괄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였더라..?
B.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500-428)
아낙사고라스는 이오니아(클라쓰메나이)의 철학을 아테네로 가지고 간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자연에 관한 그의 저서는 아테네에서 1드라크마로 팔렸다고 한다. 그에게서는 유물론과 더불어 제기되는 문제거리가 특별히 명백하게 나타난다.
a) 동질소(homoiomere)
▷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 : 존재와 생성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해답이 나타난다. 그의 출발점은 무에서 어떤 것이 생겨나서 다시 무로 사라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따라서 생성이 아닌 혼합, 소멸이 아닌 분리에 대해 말하는 편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는 간단한 관찰(머리카락, 고기)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생각에 도달한다. 이미 어떤 것으로 된 것은 앞으로 될 것과 종자로서는 이미 동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궁극적인 구성요소는 “씨앗(spermata)”이며, 따라서 완성된 산물과 질적으로 똑같다. 이 궁극적인 구성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동질소”이다. 아낙사고라스에게는 질적으로 다른 동질소들이 무한히 많이 있다. 완성된 사물들의 본질은 질적으로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동질소들은 영원하며, 파괴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한 가지 정해진 질이 우세하면, 개별적인 사물이 그 특색을 가지게 된다.
▷ 아낙사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 : 그들은 서로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아낙사고라스에게서는 종합을 하는 정신을, 데모크리토스에게서는 분석을 하는 정신을 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에겐, 형성된 것이 본질적인 것으로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동질소들도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들이다. 데모크리토스에게는, 밀레토스학파와 파르메니데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형성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 우위를 차지한다. 문제는 결국 한 번 더, 본질적인 것은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특수한 것? 보편적인 것?)하는 문제가 되고 만다.
b) 정신(nous)
▷ 세계는 물질 이상의 것이다 : 이렇게 의미의 통일과 전체성과 실체로 기울어져 있는 사고(의미의 통일과 전체성은 무슨 의미지??)는 아낙사고라스의 제2의 기본사상인 ‘정신’에 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에 의해서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인 근본적으로 보완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인과관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목적의 원인이 작용을 미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도 있다.
▷ 전체성, 의미, 정신 : 분석적이고, 오직 물질적 부분들만 고려하는 존재고찰방법 외에, 의미의 통일성과 전체성, 목적관련과 질서관련을 고려하는 종합적인 방법이 주장되었다. 이렇게 형상론적-목적론적으로 존재를 해명하는 일은, 논리적임(어떤 면에서?)과 동시에 한 가지 원리를 전제함으로써 가능하다. 아낙사고라스는 사고하는 힘임과 동시에 의지의 힘이기도 한 정신(nous)을 이 원리라고 생각했다. 정신은 만물에 있어서 운동의 근원이며, 동시에 질서의 원리이다. 또한 무한하며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전지전능하다. 여전히 정신을 “미세하고 순수한 질료”라고 보는 것처럼, 물체적인 것에서 완전히 구별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최초의 이원론자였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c) 세계의 형성
영원한 씨앗들이 뒤섞여 있던 태초에 정신이 개입하여 운동(회전)을 일으키고, 하나하나의 것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여 우주에 질서를 생기게 했다. 정신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난다. 정신은 세계를 창조한 자가 아니라, 세계를 만드는 목수이며, 또 이 목수만으로 세계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기계적인 여러 원인들이 당장 그들 자신의 의무를 나눠 맡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개념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처음으로 생기며, 이데와 정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비로소 모든 것을 꿰뚫고 가장 작은 것에까지 이르는 존재를 형성하는 힘으로 된다.
d)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 von Apollonia)
▷ 목적론적인 자연해석 : 그는 아낙사고라스가 소홀히 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난했던 것, 즉 모든 자연형상에는 목적(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썼다(신체조직 내에 있는 합목적성이 본보기로 이용된다). 또한 그는 정신의 작용범위에 관해서도 말한다. 정신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도 있다는 것이다. 정신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에 생명을 부여한다. 아마도 정신은, 모든 것을 알고 질서지우며 만들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다 나눠 가지고 있는 일종의 유일한 근본원소(요소)일지도 모른다.
▷ 자연신학으로서의 목적론 : 이 정신이 신이기도 하다. 그는 엠페도클레스나 아낙사고라스처럼 원리가 여러 개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다시 한 가지의 유일한 원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물질적인 것과는 다른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아마도 힐쉬베르거는 그것이 ‘신(또는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디오게네스가 신적인 정신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정신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작품을 보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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