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통론1 - 3주차 발제 (2018. 3. 16)
천문학과 우주론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조장현
Kathleen M. Crowther and Peter Barker, “Training the Intelligent Eye: Understanding Illustrations in Early Modern Astronomy Texts”, Isis 104(3) (2013), pp. 429-470.
1. 원전 독해에 대한 문제의식
우리는 과학사의 1차 문헌을 살펴볼 때 역사가의 입장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까?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다. 하지만 만약 역사가의 일차적인 임무가 비역사적인 왜곡을 최대한 줄이고 문헌의 저자 자신이 그것을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바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필자는 저자가 사용한 용어와 개념, 표현과 같은 것들을 먼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용어, 개념, 표현 등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단순히 우리말로 일대일 치환함으로써 우리의 관념을 덧씌우지 않고, 문헌이 등장한 당시의 관념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문헌에 ‘로고스logos’라는 그리스어가 등장했다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고스’에 집약된 당시의 수많은 관념(말, 이성, 정의된 말, 이치 내지 원칙 등)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무슨 수로 당시의 관념들을 알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약 13세기부터 대학이 수효와 규모 면에서 극적으로 성장한 바, 당시 활동했던 상당수의 학자들은 학교에서 그 관념들을 물려받았을 것이므로 학교에서 주로 사용한 교재를 검토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위와 같은 측면에서 보았을 때, Kathleen과 Peter(2013)의 글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들은 13세기 중반부터 17세기 말까지 유럽의 각 대학에서 교과서로 널리 사용된 천문학 텍스트인 『천구에 대하여De sphaera』(이하 『천구』)와 『행성들에 대한 이론Theorica planetarum』(이하 『이론』)에 등장하는 삽화의 기능과 의미를 당시의 맥락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두 텍스트를 특정한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텍스트에 등장하는 삽화의 기능이 독자의 시력vision을 육체적인corporeal 것에서 지성적인intellectual 것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각 텍스트의 삽화를 살펴보며 그것의 기능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삽화 속 요소들의 의미를 분석한다.
2. 두 텍스트가 속한 역사적인 맥락
저자는 두 텍스트를 중세 말, 근대 초에 유행했던 사상인 ‘시각적 상과 인식에 대한 이론theories of vision and cognition’과 연결시킴으로써 특정한 역사적인 맥락,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기독교 신학 속에 위치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각적 상vision'을 육체적인corporeal 것, 영혼적인spiritual 것, 지성적인intellectual 것과 같이 세 차원으로 나누었고, 이러한 구분은 중세 내내 널리 수용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은 ’지성적인 상‘이었는데, 이는 육체적인 것과는 무관하고 신적인 진리divine truth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 초기에는 육체적인 상이 지성적인 상을 방해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13세기가 되자 부분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으로, 육체적인 상 또한 지성적인 상을 가지기 위한 단계의 일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평가의 원인은 기독교에서 ’시각적 신앙 행위visual piety'가 점차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저자는 『천구』와 『이론』의 삽화가 육체적인 것에서 지성적인 것으로 독자의 시력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우주cosmos의 구조는 눈에 보이지 않고, 더 중요하게는 당시 유럽인들이 하늘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주의 구조는 신성한 것이므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성적인 시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저자가 Michael Baxandall의 연구를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그는 15세기 이탈리아의 회화를 주제로 삼고, 당시의 사람들은 그림을 볼 때 지금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 즉 수학적인 요소들을 본다고 주장했다("the period eye"). 저자는 본인이 Baxandall처럼 중세 말, 근대 초 천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삽화에서 보는 것을 재현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마도 선행 연구들 중에서 Baxandall의 연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다.
3. 두 텍스트에서 삽화의 의미와 구체적인 기능
저자는 이어서 『천구』와 『이론』에 나오는 삽화를 세부적으로 분석하여 삽화의 의미를 밝히고, 그 기능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본문의 삽화뿐만 아니라 권두 삽화에서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천구』의 권두 삽화를 통해 교양 커리큘럼arts curriculum에서 천문학의 위치와 천문학에서 그림의 역할에 대한 당시의 관점을 끌어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적어도 논문의 권두 삽화가 실린 판본의 시기인 15세기 말 이후부터는) 자연철학에 비하여 천문학의 위상이 생각보다 그렇게 낮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번째로는, 당시의 교과서가 생각보다 굉장히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두 텍스트 모두 삽화를 통해 단순히 어떤 형상을 마음속에 떠올리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상들의 움직임까지 조작할 수 있게끔 독자를 훈련시킨다. 특히 『천구』의 앞부분에서는 구를 3차원으로 마음속에서 떠올리도록 할뿐만 아니라 반원을 회전시켜 구를 만들게 함으로써, 방금 언급했듯이 상들의 움직임을 새길 수 있도록 기초부터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반지 삽화를 통해 ‘천구 고리orb'가 천체를 나르는 방식을 초보적인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며 이후 ’우주 단면cosmic section'에 대한 논의를 대비하고 있다. 이렇게, 교과서의 집필 순서를 통해서 당시의 학자들이 특정 분과를 어떤 식으로 연구했는지를 짐작하는 과학사 연구 방법론은 기억해두었다가 다른 주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세 번째, 저자는 『이론』(특히 포이에르바하의 『새로운 행성 이론』)이 ‘우주 단면’ 삽화를 통해 독자에게 훈련시키려고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우선 2차원 천구 고리 그림(Figure 14)를 통해 부분적인 우주 단면의 메카니즘을 학습시킨 뒤, 이를 좀 더 복잡한 그림(Figure 15, 16)에 적용하여 3차원의 천구 고리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한다. 그 뒤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와 같은 심화 서적에서 등장하는 2차원의 기하학적 모델을 보고 방금과 같은 2차원 또는 3차원 천구 고리를 표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습을 통하여, 반대로 천구 고리 그림을 보고 프톨레마이오스의 기하학적 모델을 추상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 인쇄 판본에 등장하는 유명한 그림이 행성들의 ‘궤도orbit’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우주 단면’을 표상한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이 인상 깊었다. 이 그림은 많은 과학사학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켜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잘못 이해하도록 한 장본인이다. 저자는 같은 책의 필사본과 후대의 학자들이 재현한 그림을 분석하고, 당시에는 궤도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맥락까지 고려해 결론을 내리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4. 결론 및 요약
궁극적으로, 위와 같은 논의를 통하여 저자는 두 텍스트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기하학적 모양의 도형, 우주 단면, 천구 고리 모델 등)이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마음속에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을 조작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도입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등의 주요한 학자들도 이러한 시각화 기법visualizing technique을 사용했음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저작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저자의 논의는 각별히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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