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통론1 - 4주차 발제 (2018. 3. 23)
수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조장현
Glen Van Brummelen, Heavenly Mathematics: The Forgotten Art of Spherical Trigonomet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Chapter 4.
Peter Dear, Discipline and Experience: The Mathematical Way in the Scientific Revolution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pp. 151-179.
1. Glen Van Brummelen, Heavenly Mathematics: The Forgotten Art of Spherical Trigonomet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Chapter 4. The Medieval Approach
1) Menelaus의 정리와 다른 새로운 방법
Menelaus의 정리보다 기억하기 쉽고 적용하기 쉬운 방법을 새롭게 발명한 후보 중 한 명은 Abu Mahmud al-Khujandi이다. 또 다른 후보는 극삼각형polar triangle의 발명자인 Abu Nasr Mansur ibn 'Ali ibn 'Iraq이다. 그는 ‘Rule of Four Quantities’와 ‘Abu Nasr's Second Theorem’이라 불리는 두 개의 새로운 정리를 제안한다. 이 정리들은 수학적인 깊이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서 쉽게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천문학 분과에서 매우 각광받았다. 한편, Rule of Four Quantities는 ‘국소성 원리principle of locality'를 따른다. 즉, 이 규칙이 어떤 구면 삼각형을 무한하게 작게 만들었을 때에는 평면 삼각형에 대한 규칙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Abu Nars는 The Determination of Spherical Arcs에서 al-Kuhi가 해결했던 ‘rising times problem’을 그의 두 정리를 이용하여 해결한다. 이 방법은 Menelaus와 al-Kuhi의 방법보다 훨씬 더 쉽고 빨랐다.
한편 Rule of Four Quantities는 ‘spherical Law of Sines’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Abu Nasr와 Abu 'l-Wafa' 사이의 우선권 논쟁이 있었지만, 저자는 Abu 'l-Wafa'의 방법만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Almagest에서 탄젠트와 ‘minor trigonometric function’을 천문학 문제에 도입했다. 또한 Law of Sines를 증명하기도 했다. Law of Sines은 그 간결함과 일반성 때문에 당시 천문학자에게 Rule of Four Quantities보다 더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계산하려 했던 양이 각보다는 호arc였기 때문이다.
2) 인도의 구면 기하학
중세 기하학이 오로지 이슬람의 수학과 천문학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말까지 유럽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작업이 이슬람의 작업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을 논의에서 제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인도의 학자들은 그리스에서 ‘현chord’을 개발한 후, 이슬람이 나타나기 전에 사인 함수를 개발했다.
흥미롭게도, 인도의 접근법은 그리스와 이슬람과 전혀 다른 전통 속에 있었다. 인도 수학자들은 Menelaus의 정리를 사용하지 않고 피타고라스 정리와 ‘Rule of Three’(닮은 삼각형들의 변들의 비율에 대한 규칙)만을 사용하여 태양의 위치를 표현하는 황도 좌표계를 적도 좌표계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3) 메카 방향 찾기
천문학자는 이슬람의 종교 관습 중 낮 동안의 금식, 5일간의 기도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금식하는 날짜와 시간을 알기 위해 초승달의 첫 번째 출현을 예측하고 Ka'ba의 방향(qibla)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Ka'ba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는 지구 위에서 완벽한 삼각형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학자들은 그 삼각형을 평면 삼각형으로 근사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900년대가 되자 구면 삼각법을 기반으로 한 정확한 해결책이 등장했다. Al-Biruni는 적어도 4가지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중에서 저자는 Rule of Four Quantities를 이용한 방법만을 소개하고 있다. 이 방법은 메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사용해서 어떤 방향이든지 찾을 수 있다. 한편, Shams al-Din al-Khalili와 같은 사람이 qibla의 표를 만들기도 했다.
2. Peter Dear, Discipline and Experience: The Mathematical Way in the Scientific Revolution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pp. 151-179.
1) Mechanical Nature
기계적 철학은 인위적/자연적 구분이 사라지면서 대두되었고, 수학적 과학의 우월성을 존재론적으로 입증해주었다. 이러한 과정은 “인위art”, “자연nature”, “기계machine”의 세 범주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양상, 즉 그것들의 관계가 새로워질 때마다 의미도 새롭게 바뀌는 양상을 인지해야지만 이해할 수 있다. ‘기계로서의 세계’라는 관념을 만듦으로써 ‘세계로서의 기계’라는 관념 또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17세기 이전 인위/자연의 구분은 인공적인 고안품을 자연지식을 형성하는 데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결국 수학적으로 자연철학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17세기 들어서 인공물에 대한 경험이 자연철학에 포섭되게 됨으로써 인공과 자연의 관계가 세계를 기계로 보는 식으로 재배치되었다는 식으로 당시 기계적 철학의 발흥을 인위/자연의 관계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구분은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기계적 철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낳을 수 있었을까?
2) Nature and Art
17세기 초 자연철학자들은 자연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이고, 변화는 목적론적인 과정이라는 식의 스콜라-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라 자연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과학적인 설명이란 사물의 특정한 본성, 즉 목적인으로서의 형상인을 적시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러한 설명의 모범적인 사례가 생물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화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자들은 신이 언제든지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학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과학적인 설명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인 결과를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정적 방법ex suppositione'이라는 테크닉을 개발했다. 어떠한 우연적인 방해가 없다면 사물이 현실태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경험적 진술의 보편성을 함의한다. 오직 감각에 의해 습관적으로 제공된 경험만이 과학적인 관련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견해 속에 ‘인위art'와의 대비가 들어 있었다. 인위가 자연의 목적을 인간의 목적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자연적인 과정은 인위적인 원인에 의해 파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베이컨에게 있어서 인위란, 자연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게끔 상황situation을 설정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는 인위/자연 사이의 벽을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다. 베이컨이 취한 입장의 근저에는 자연 지식의 목적에 대한 다른 견해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위/자연 구분은 인간의 목적과 자연의 목적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에 근거하고 있었고, 따라서 인간의 목적은 참된 자연철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베이컨에게 있어서 자연철학의 목적은 인간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느냐에 대한 지식을 만드는 데 있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목적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견해가 Pierre Guiffart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인위와 자연 사이를 구분했지만, 자연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그것을 설명했다. 자연은 규칙들rules(또는 법칙들laws)에 의해 움직였고, 인간은 그 규칙을 사용하여 목적을 달성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규칙(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로 세계관이 변화하는 양상의 한 단면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견해 속에서야 비로소 실험적 조작experimental contrivance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실험적 조작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자연의 상태behavior가 어떤 고안된 특수적인 상황 하에서 밝혀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자연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은유적 동일화metaphorical identification’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은유’라고 해서 단순히 말뿐인 것은 아니다. 당시 자연철학자들은 그 은유를 기호적semiotic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모방하는mimetic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생각은 Guiffart의 유리관에 대한 기술과 William Gilbert의 구형 자석terrella에 대한 기술에서 잘 드러난다.
3) Demonstrative Mathematics versus Causal Physics
인위/자연의 구분은 자연철학을 수학에서 떼어놓고 있었던 반면, 흥미롭게도 자연에 대한 지식에 기여할 수 없다는 비판으로부터 수학적 과학mathematical sciences에서 인위적인 수단artificial contrivance를 사용하는 것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수학과 자연철학 사이의 첨예한 경계는 수학이 다루는 대상이 자연철학이 다루는 대상과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초 예수회 수학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수학적인 작업이 물리적인 현상을 고려하긴 했지만, 오직 양적인 측면만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리적 원인 설명은 물리학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수학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질문들은 수학자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식으로 수학적 과학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연철학과 수학의 분리는 수학적 과학에 실험적 방법을 도입하는 일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질적인 자연철학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수학적 과학이 자연의 원인을 탐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수학적 논증의 명료함을 돋보이게 했다.
수학적 과학과 자연철학 사이의 경계가 당시에 뚜렷하게 인지되었다는 사실은, 이따금씩 그 경계를 넘는 것에 대한 Blancanus, Orazio Grassi와 같은 학자들의 언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더 나아가 그 경계는 혼합된 수학적 과학, 즉 물리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수학적 과학의 논증의 확실성이 물리학의 확실성보다도 더 확고하다는 생각을 낳게 했다. 예컨대 Blancanus는 Sphaera mundi(1620)에서 물리학자의 추측conjecture이 아니라 확고한 지식을 논하려고 했으며, Scheiner는 Rosa ursina(1630)에서 수학적 과학의 확실성이 물리학보다 더 뛰어나다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표출했다.
또한 경계는 수학의 논증을 오염taint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Blancanus가 천체가 지상에 미치는 영향은 자연적인 원인에 해당하고, 자연적인 원인에 대한 설명은 수학이 아닌 물리학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점성술을 천문학과 똑같은 위상을 가진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수회 수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회의 교육 커리큘럼에는 수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예수회 수학 선생들은 자연철학 선생들과 대체로 동등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회 수학자들은 스스로가 물리적인 질문에 답하지 않음으로써 수학적 과학과 자연철학 사이의 경계를 첨예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수학이 물리학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중 Aguilonius는 Opticorum libri sex(1613)에서 아르키메데스를 칭송하며 예수회 수학자들이 철학적인 종류와 수학적인 종류 모두를 포함하는 수학을 일궈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Scheiner은 수학과 망원경을 사용한 관측을 통해 얻은 태양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천체 물리학에 많은 진리를 드러내 주었다고 이야기하며, 새로운 수학적 발견과 논증들이 물리학에 도움을 주었음을 적시했다.
마지막으로, 수학적 과학과 자연철학의 경계는, 수학적 과학에 의해 연구되는 한에서 인공적인 수단에서 끌어낸 경험적인 원리들이 물리적 실재에 대한 연구에서도 사용될 수 있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이 되자 예수회 소속 저자들과 비예수회 저자들의 저작에서 ‘물리수학physico-mathematics’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4. Physico-Mathematics
아리스토텔레스는 ‘복합 수학적 과학mixed mathematical science’을 순수 수학의 한 갈래라고 생각했고, 어떤 종속된 과학은 보다 상위의 과학에서 도출된 결론을 사용해서 탐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복합 수학적 과학의 종속 범위가 순수 수학의 갈래를 넘어 물리학 자체를 포함한다는 견해가 확산되었다. (Aguilonius, Arriaga) 좀 더 명시적인 견해는 Hugo Sempilius의 교과서 De mathematicis disciplinis libri duodecim(1635)에 등장한다.
‘물리수학’이라는 용어는 위와 같은 배경에서 점진적으로 출현하였다. 용어의 역사적 의미는 분명하지만, 표현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1618년 말 Isaac Beeckman은 그러한 새로운 생각에 대한 징조를 나타냈다. 데카르트를 소개하는 글에서 그들 자신을 물리수학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심지어 Beeckman은 1627년에 “물리수학적 철학”이 “참된 철학”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새로운 범주 덕분에 수학적 과학자들은 이전 시기보다 철학적인 주장을 더 쉽게 제기할 수 있었다. 또한 수학적 과학의 위상과 설명력을 상승시키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과정 중에 물리수학적 진술이 실험에 관련된 내용과 함께 등장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예수회 학자인 Athanasius Kircher는 Ars magnesia(1631)에서 물리수학의 특징을 다양하게 적용함으로써, 그리고 매일의 경험을 통해 확증 가능한 방법이라고 명시하면서 자석에 대한 각 명제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실험을 제시했다. 흥미롭게도, 물리수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는 수학적 과학이라는 꾸밈으로 그 세부 내용을 가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Paul Guldin은 Dissertatio-phisico-mathematica de motu terrae(1622)에서 지구의 운동을 다뤘으며, Beeckman은 소립자를 사용하여 지구의 운동을 설명했던 것이다. 또한 1636년에 Konigsberg의 수학 교수가 학생을 대상으로 낸 시험 문제를 통해서도 그러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그 용어가 당시에 어느 정도로 퍼졌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이 되자 물리수학이라는 용어는 일상적으로 쓰이기에 이른다. Honore Fabri는 Tractatus physicus de motu locali(1646)에서 물리수학을 표방하며 낙하 물체 등 다양한 물리적 현상을 다루었다. 그의 예수회 형제 Riccioli는 Almagestum novum(1651)에서 천문학은 물리수학적 과학이라는 점을 밝히고, 물리수학이 “절대 보증 가능하며infallible”, “확실한certain” 결론으로 이끈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Francisco Maria Grimaldi는 Physico-mathesis de lumine(1665)에서 빛의 회절에 대해 논했는데, 그 결과가 수학적으로 확실하다고는 하지 않고, “아마도probably”라는 표현으로 그 가능성만을 타진했다. 한편 Gaspar Schott은 Magia universalis(1657-1659)에서 역학을 수학적인 것과 ‘물리역학적physico-mechanical’인 것으로 나누었고, 결국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전자만을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Issac Barrow는 물리수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모든 물리학은 양qunatity과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수학과 떨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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