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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2) - 우장춘, 이휘소, 김봉한
김근배, “우장춘의 한국 귀환과 과학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6(2) (2004), 139-164.
정종현, “과학과 내셔널리즘 - ‘해방전후’ 과학(자)의 이동과 우장춘 서사의 과학 담론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39 (2013), 207-249.
Sung Won KIM, “Korean Prometheus? Mythifying Benjamin Whiso Lee,” EASTS 8(2) (2014), 195-208.
김근배,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북한 ‘봉한학설’의 부침” 한국과학사학회지 21(2) (1999), 194-220.
1. 김근배, “우장춘의 한국 귀환과 과학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6(2) (2004), 139-164.
우장춘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흔히 쟁점으로 삼는 주제는 왜 그가 한국행이라는 선택을 했는가하는 것이다. 김근배(2004)는 기존의 우장춘 재현 서사가 제시하는 설명을 비판하며 그의 한국행을 ‘조국애’ 때문이라 보기는 힘들다고 적시한다. 대신에 환국의 직접적인 계기는 ‘우장춘 환국추진운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장춘 특유의 ‘과학 휴머니즘’이 자리 잡고 있었고, 따라서 조국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소명의 수행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한데, 그가 과학 휴머니즘만을 귀환의 요인으로 꼽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에서 그렇게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한국식 성을 사용함으로써 농업시험장에서 받았던 차별 또한 요인들 중 하나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과학 휴머니즘을 주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학 휴머니즘으로 과연 한국행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에 계속 거주하면서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과학 휴머니즘 아닐까? 게다가 일본에는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과학 휴머니즘은, 아마도 직장인 농업시험장에서 받았던 차별 기억과 해방 이후 개인 연구농장 설립의 실패, 그리고 때마침 일어난 우장춘 환국추진운동으로 인한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 속에 위치시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 문제는 정종현(2013)의 논문과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롭다.
한편, ‘씨 없는 수박’ 개발이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신화였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다면 그러한 잘못된 사실이 어떻게 대중적으로 퍼지게 되었을까? 자신이 세운 과학연구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펼친 전략 중 육종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고자 씨 없는 수박을 강연 주제로 자주 활용했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이 퍼지게 되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이 문제 또한 정종현의 논문과 비교하면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2. 정종현, “과학과 내셔널리즘 - ‘해방전후’ 과학(자)의 이동과 우장춘 서사의 과학 담론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39 (2013), 207-249.
정종현(2013)은 귀국의 동기를 김근배와 달리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관점, 즉 자신의 연구를 지속시킬 국가의 지원을 따른 과학자의 이동이라는 관점을 통해 이해하고 있다. 김근배는 앞선 논문에서 우장춘이 일본에서 한 과학활동과 한국에서 한 과학활동 사이의 차이점을 근거로 그가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를 추론한다. 하지만 정종현은 우장춘이 한국을 방문한 후 1938년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일제하에서의 과학활동이 ‘환국’ 이후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됨을 보인다.
또한 김근배 논문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던 조국에 헌신한 애국자로서의 우장춘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본 논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지점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우장춘의 영웅적 이미지가 그의 아버지 우범선의 특별한 과거 거취와 얽혀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3절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필자는 처음에 3절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남희의 장편소설을 왜 이렇게 길게 언급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절을 모두 읽고 난 후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장춘의 영웅 서사는 우범선을 구한말 개화파 ‘혁명지사’로 명명하는 맥락 하에서 더욱 격동적으로 보이도록 구성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서사 속에서 우장춘의 귀환은 조선의 독립과 부강을 염원한 아머지의 꿈을 실현시킨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우장춘의 연구는 지식과 종자의 독립의 상징으로 표상하는 방식으로 그 이미지가 발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씨 없는 수박’ 강연이 우장춘의 육종학이 산업발전 및 애국과 연결되는 지점이었다는 해석도 흥미로웠다. 그가 ‘씨 없는 수박’을 위시하여 보인 과학의 권능은 농민뿐만 아니라 위정자와 엘리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며, 이 효과를 우장춘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하진 않지만, 우장춘은 이렇게 씨 없는 수박의 효과를 활용함으로써 연구공간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하나의 연구전통을 오랫동안 지속시켜 소위 ‘장춘학파’라는 그룹을 형성하여 육종연구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과학휴머니즘'은 보편적인 인류애라기보다는 도와준다는 의미.
과학사학자가 쓴 우장춘 관련 연구 글은 김근배 교수 것이 거의 유일하다. 이승만이 왜 우장춘을 데려오려고 했는가와 같은 문제는 아직도 잘 밝혀지지 않았다. 자유당이 가지고 있었던 취약한 이미지를 보충하기 위해서라고 추측.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라는 말은 8-90년대에 가서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왜 한참 뒤에 등장하기 시작했을까? 박성래의 경우, <인물과학사>에서 우장춘을 민족주의적인 서사로 묘사한 바 있다.
씨 없는 수박은 마치 갈릴레오의 망원경과 같다. 후원의 도구.
장춘학파의 존재는 한국과학사에서 독특한 요소이다. 한국에는 외국처럼 학파가 없다. 아마도 반복되는 유학 탓일텐데,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겠다. 유일한 예외가 우장춘과 현신규이다. 하지만 장춘학파를 정말로 '학파'라고 볼 수 있을까? 하나의 학파는 독특한 암묵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장춘학파가 가지고 있었던 패러다임이나 암묵지는 무엇인가? 김근배 교수의 논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학파'라고 칭할 수 있을텐데, 아직 분명하지가 않다. 따라서 연구 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종의 합성'과 관련해서도 우장춘의 위대한 연구 업적이라 바로 말할 수 있을까? 식물의 잡종은 린네 식물학에서도 확립되어 잏었다. 우장춘의 합성 이론은 진화론에 변혁을 일으킬만한 성과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장춘의 연구 업적은 무엇일까?
3. Sung Won KIM, “Korean Prometheus? Mythifying Benjamin Whiso Lee,” EASTS 8(2) (2014), 195-208.
Kim(2014)은 이휘소의 신화화 구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대중들은 1990년 전후로, 유신체제에 대한 향수, 반일본 민족주의, 통일에 대한 염원, 핵물리학에 대한 낙관적인 이미지 등을 제각각 가지고 있었다. 이때 이 요소들을 갖춘, 공석하와 김진명의 두 소설이 등장했고 대중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이휘소의 신화는 확산·재생산되었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이휘소는 신화화될 수 없었다는 것, 달리 말하면 대중이 이미 그 신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논점이 되겠다.
독특하게도, 이휘소는 이태규·리승기·김봉한의 경우처럼 국가 또는 동료 과학기술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신화화된 것이 아니었다. 한편, 저자의 논지처럼 이미 그것이 받아들여질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소설이 그러한 수용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휘소는 어떻게 그러한 방식으로 소설화될 수 있었을까?
2010년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이휘소의 진실』에는 공석하 작가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는 이휘소의 생애에 대해 듣고는 대중에게 소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를 소설화했고, 그 과정에서 작품성을 위해 20%(?)의 픽션을 더했다고 한다. 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공석하는 소설의 흥행을 위해 당시 대중의 코드 중 하나인 유신체제에 대한 그리움을 포착하여 (아니면 본인이 그 그리움을 간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휘소라는 매력적인 인물과 그것을 결합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휘소의 사례를 통해, 당시 과학이나 과학자가 민족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핵무장을 해서 나라가 부강해지면 열강들이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을 텐데 하는 등의 생각 말이다. 이는 천재 과학자 한 명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입자물리학을 하면 핵물리도 가능할 것이라는, 일종의 환원주의도 살펴볼 수 있다.
공석하가 책에서 박정희 친서를 인용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루머가 빠르게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90년대 초반에 주체사상파가 득세. 주적은 미국, 북한은 친구라는 입장. 이를 고려하면 왜 김진명 소설이 히트를 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은 반일+반미 민족주의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특정 인물의 행각을 마치 실화처럼 묘사했다.
4. 김근배,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북한 ‘봉한학설’의 부침” 한국과학사학회지 21(2) (1999), 194-220.
우선 김근배(1999)의 논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리승기의 비날론 연구뿐만 아니라 김봉한의 봉한학설 또한 주체사상의 대두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날론 연구와 주체사상 확립이 그런 것처럼, 봉한학설과 주체사상 확립도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서로 간에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비슷한 관점에서 두 연구를 보고 있는데, 혹시 두 연구간 주목할 만한 차이점은 없을까?
김근배는 『‘리승기의 과학’과 북한사회(1998)』에서 리승기의 연구가 가진 과학적 성과를 그의 연구가 북한에 수용된 주된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연구는 북한 인민의 삶의 증진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봉한의 연구는 어떠한가? 저자는 김봉한의 첫 번째 연구성과가 대개 당 관료나 정치성이 짙은 학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며 과학적인 판단보다 정치적인 고려가 우선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연구성과 또한 학술보고회 참가자들이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체계적인 학술 평가를 한 경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봉한학설에는 주목할 만한 과학적 성과가 없었을까? 더 나아가 그것이 주체사상과 연결되는 방식이 비날론 연구와 또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진 않을까?
김봉한의 학설은 왜 몰락했을까? 시기적인 유사성 이상의 증거를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세포-산알-세포의 큰 이론으로 발전했지만, 서양 생물학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기이한 현상으로부터 북한과학에 대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없을까? 증거를 찾기 힘든 상황이 북한과학에 대해 던지는 메세지가 무엇일까? 역사적 증거가 없는 것이 무엇에 대한 증거가 될까?
김연화 석사논문 참조할 것.
소광섭 박사의 연구를 동료 연구자들은 왜 믿지 않을까?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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