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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한국현대과학사

3. 인물(1) - 이태규, 리승기

3.

인물(1) - 이태규, 리승기

 

John DiMoia, “Transnational Scientific Networks and the Research University: The Making of a South Korean Community at the University of Utah, 1948-1970,”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an International Journal 6(1) (2012), 17-40.

송상용, “이태규, 한국 화학의 길을 연 과학계의 큰 별한국사 시민강좌50 (2012), 273-284.

김근배, “리승기의 과학과 북한사회”, 한국과학사학회지20(1) (1998), 3-25.

김태호, “리승기의 북한에서의 비날론연구와 공업화-식민지 유산의 전유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23(2001), 111-132.

김동광, "해방 공간과 과학자 사회의 이념적 모색," 『과학기술학연구』 6(1) (2006), 89-118.

김근배, "남북의 두 과학자 이태규와 리승기-세계성과 지역성의 공존 모색," 『역사비평』 82 (2008), 16-40.

 



1. John DiMoia, “Transnational Scientific Networks and the Research University: The Making of a South Korean Community at the University of Utah, 1948-1970,”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an International Journal 6(1) (2012), 17-40.

DiMoia(2012)는 우리들이 통상 접할 수 있었던 이태규에 대한 평가와 완전히 다른 인물로 그를 그려낸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태규의 유타 이주의 성격을 자아형성self-fashioning'으로 규정한다. 서울대학교를 둘러싼 국대안 파동에 휘말려 친일파로 비난 받았지만 유타로 이주한 후 펼친 각종 활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세계과학자로 거듭난 것이다. 과학을 일종의 네트워크로 본다면, 과학자는 각종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포함한 네트워크를 확장·변형해 나가는 행위자로 볼 수 있다. 그 과정 중 네트워크에 속한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과학자 자신의 정체성(또는 자아)도 변화하는데, 이태규와 그를 위시한 유타 커뮤니티가 그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태규를 이른바 세계과학의 대표주자로, 리승기를 이른바 주체과학의 대표주자로 서로 대립시켜 개인의 성취를 국가의 성취로 등치시키는 구도가 이태규의 측면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단면을 저자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세계과학은 국지성과 다른 요소의 개입가능성 보다는 보편성과 중립성을 강조하는 과학이라 할 수 있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이태규를 비롯한 1세대 미국 해외 유학파 과학자들이 귀국하면서 순수 과학 이데올로기를 주장함으로써 형성되었다. 그 이데올로기는 당시 남한의 과학과 사회의 각종 상호작용(예컨대 박정희 시기 중화학산업진흥정책과의 상호작용)을 보지 못하게 했고, 그에 비해 명시적으로 사회주의체제에 맞는 과학을 내세웠던 북한과 대비되어 이분법적인 구도가 고착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의 연구는 아직까지도 한국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이해, 즉 과학자들은 정치적인 중립성을 가지고 과학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윤리적이라는 생각의 기원과, 해외 유학 출신이 학계와 사업 분야에서 더 좋은 자리로 빠르게 가는 현상의 기원 중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2. 송상용, “이태규, 한국 화학의 길을 연 과학계의 큰 별한국사 시민강좌50 (2012), 273-284.

송상용(2012)은 이태규를 위인전식 서술로 소개하고 있다. 글을 통해 초년 시절부터 교토, 유타 시절을 거쳐 영구 귀국하여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조명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태규에 대한 조심스러운 평가를 내놓는다. 지극히 평범한 과학자였고 틀림없는 보수주의자였으며 체제에 안주하는 성격의 인물로서, 해방 이후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과학사학자들이 이태규와 리승기를 세계과학과 주체과학의 대조로 본다고 저자가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과학이란 용어는 아마도 김근배(2008)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인물을 세계성과 지역성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완벽하게 가를 수 없다는 것이 김근배의 논점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단일한 이미지로 평가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실제 사실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고 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송상용이 왜 이렇게 쓰고 있는지 참 모를 일이다.

또한 이태규가 리승기보다 과학자로서 훨씬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던 저자의 평가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이는 이태규라는 인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아야만 그 평가의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과학자로서의 행복하고 보람된 삶이란 무엇일까?


이태규의 사례는 과학기술 발전의 상호 transnational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한국으로의 일방적인 영향이 아니었다. 아이링의 이론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도 한국 학생들이 많이 기여했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문으로 볼 수 있다. 주변에서 중심으로의 영향 또한 많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 강력한 영향은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영향이었다.

Ree-Iring 이론이 일반적으로 이론화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 : 순수/응용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산업과 연관을 맺을수록 훨씬 더 fundamental한 연구가 가능하다는 사례. 연관을 맺음으로써 이론적으로 더 일반화되고 깊어진다. 미국과학사에서 이런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ex. Halley Roland(?). 기업체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연구를 진행. pure science 이데올로기의 주창자. 스탠포드 대학에서 레이더에 대한 fundamental한 연구 수행. 한편으로는 산업체에서 펀딩을 받아 연구 진행. 중심부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일이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발전된 이론의 한 부분을 떼어 왔을 뿐. 우리의 필요에 의해 발전된 이론이 아니므로 우리 사회와 훨씬 덜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기초과학이 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지 못했다. 우리나라 과학의 가장 큰 문제. 해외에서 배워 온 일부를 그대로  가져옴. 일종의 post-colonial한 관계. 이태규 시기에 시작되었던 현상이 아직도 극복이 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과학은 한국의 사회에 깊게 뿌리 박힌 상태가 아니다.

 

3. 김근배, “리승기의 과학과 북한사회”, 한국과학사학회지20(1) (1998), 3-25.

1950년대 후반에만 해도 국내파 과학기술자들이 소련 등 해외의 과학기술자들과 접촉하며 투철한 사상의식을 체득했고, 마치 신진 해외파와 한 편이 되어 오랜 인텔리계층을 비판했던 것으로 김근배(1998)는 쓰고 있다. 하지만 이후 어떻게 된 일인지 1958(또는 1956) 이후 국내파는 과학 연구 사업에서 주체를 살려야한다고 말하며 선진과학의 전면적인 도입을 주장하는 해외파와 갈등을 일으켰다. 저자는 그 이후 리승기의 비날론 연구가 공업화되었을 때 주체라는 말이 보다 널리, 적극적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기술하며, 이러한 주체의 재발견이 비날론 공업화의 의의를 정치경제적으로 해석, 유추하는 속에서 얻어졌다고 보고 있다. 비록 저자의 논지가 리승기의 과학을 중심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이를 주체사상 확립의 준거점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사상이 확립되는 데 기여한 요소 중 하나인 해외파와 국내파 사이의 세력 갈등은 논문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국내파의 태도 변화(‘투철한 사상의식에서 과학 속에서의 주체 확립으로)에 대해서는 저자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태도가 바뀐 시기가 비날론 공장이 성공적으로 설립되기 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 단순히 리승기의 연구 결과로 인해 주체 확립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을 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 또한 리승기에 대한 연구 못지않게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 같다.

 

4. 김태호, “리승기의 북한에서의 비날론연구와 공업화-식민지 유산의 전유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23(2001), 111-132.

김근배(1998)는 비날론 공업화가 과학에서 주체를 세운 대표적인 성과라는 북한의 관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했다면, 김태호(2001)는 비날론 공업화를 식민지 시기와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조명하여 그를 통해 탈식민사회에서 거둘 수 있는 과학적 성과와 한계를 보이고 있다.

리승기는 교토제대에서 합성1를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예상된다. 심지어 교토제대 팀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논문은 그의 상사의 이름도 들어가지 않은 채 리승기 한 사람의 명의로만 발표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인 전문 연구자 다섯 명 이상이 한 연구실에 결집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 하다. 이는 조복성이나 정태현 등의 사례를 생각해보아도 이례적이다. 저자는 그들이 식민지 치하에서 여러 억압과 차별을 받았고, 뒷날 민주주의적 목표가 주어진다면 헌신할 동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김성원(2008)과 이정(2013)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리 간단한 주제가 아니다. 따라서 리승기와 그의 동료들이 일본에서 합성섬유 연구를 하게 될 때까지의 구체적인 과정이 궁금해진다.


김근배의 분석에는 김태호의 분석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북한의 권력부는 일제와 무장투쟁을 한 그룹. 식민지 시대를 지워버리려 했다. 따라서 리승기와 비날론 연구에는 식민지 시기의 유산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측의 의도. 김근배는 실제 북한 사회에서 있었던 상호작용을 분석한 것. 김태호는 그 이면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외부와 단절된 내부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의 보편적 적용의 한계를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주체사상의 근저에 비날론 연구가 있다는 것. 북한 사상사 전공자들은 정치철학적 관념으로만 주체사상에 접근하면서 이를 거의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정치사상과 과학 사이의 상호작용. 리승기의 업적과 주체사상의 결합이 red expert의 행동을 이끌었다고 볼 수도 있다. 소련과 리센코-스탈린 주의. 정치권력이 과학에 개입하다 과학을 망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 이 사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비날론 연구와 주체사상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조명할 수 있을까? 호혜적 관계? 역사를 좀 더 길게 봐서 시기를 넓히면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라 다른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5. 김동광, "해방 공간과 과학자 사회의 이념적 모색," 『과학기술학연구』 6(1) (2006), 89-118.

6. 김근배, "남북의 두 과학자 이태규와 리승기-세계성과 지역성의 공존 모색," 『역사비평』 82 (2008), 16-40.


이태규, 리승기의 근본적인 유사성 :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이미지가 구성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

김근배 교수의 한국현대과학사 이해 : (1) 식민지 시기-진로X. (2) 45~50년대. 과학기술자들의 자주적인 노력. (3) 60~70년대. 식민지성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과학이 등장.

국대안 파동 : 국대안 반대 운동이 월북의 동기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더 고려해 보아야 함. 안동혁(대학 교육의 확장 주장)과 이태규(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소 건설 주장)가 미군정 교육자문위원회에서 핵심적 역할 수행. 그러나 미군정은 민족주의적인 안 반대. 이때 나온 안이 국대안. 하나의 대학개혁안이 아니라 정치적 이슈. 원래 있었던 이념 대립을 더욱 첨예하게 만듦. 안에 대한 반대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 월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