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제 강점기의 배경(2) - 식민지 과학기술의 특성
김근배,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 - 인도ㆍ중국ㆍ일본과 비교해서” 『한국근현대사연구』 8집, (1998), 160-194.
김근배, “식민지 과학기술을 넘어서 - 근대 과학기술의 한국적 진화,” 『한국근현대사연구』 58집 (2011), 252-283.
오선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력시스템 전환: 기업용 대형 수력발전소의 등장과 전력망 체계의 구축,” 『한국과학사학회지』 30권 1호 (2008), 1-40.
정재정, “근대로 열린 길, 철도,” 『역사비평』 (2005), 221-242.
정진성, “서평: 『일제침략과 한국 철도』(정재정 저)” 『經濟史學』 27권 1호 (1999), 248-251.
김성원, “식민지시기 조선인 박물학자 성장의 맥락: 곤충학자 조복성의 사례,” 『한국과학사학회지』 30권 2호 (2008), 353-381.
이정, “식민지 조선의 식물연구, 1910-1945 : 조일 연구자의 상호작용을 통한 상이한 근대 식물학의 형성”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제 3장, 5장.
1. 김근배,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 - 인도ㆍ중국ㆍ일본과 비교해서” 『한국근현대사연구』 8집, (1998), 160-194.
우선, 일제강점기를 해방 이후와 연결 짓는 저자의 논의를 통해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통사적 안목을 가질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오직 식민지시기의 한국 과학기술이 어떠했는지에만 주목했었다면, 당시의 과학기술이 이후 그것의 전개 양상에 큰 영향을 주었던 바, 한국 근대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러한 통사적 접근은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시기의 한국 과학기술이 해방 이후의 과학기술의 전개에 미친 영향은 6절에서 잘 드러난다. 많은 한국인들은 진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졸업 후 진로가 불투명했다. 결국 그들은 교육에 한정된 활동을 벌이거나 하급부서에서 일을 했고, 심지어 해외유학자들의 귀국 포기로 인한 두뇌유출현상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과학경력의 단절로 인해 그들의 등장이 과학기술의 전문화와 제도화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해방 후 한국의 과학기술은 많은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한편 필자는 저자가 문제제기 부분(1절)에서 식민지 역사가 그 이전 역사와 갖는 “강한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을 읽으며 한국 과학기술이 식민지 전과 후에 어떠한 연속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는지 알게 될 것을 기대하며 글을 읽었다. 그러나 저자가 연속성으로 제시한 요소는 민간 주도의 해외유학이 한국인들의 사회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발전의 근원적인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과 식민지시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과학기술을 전공으로 삼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인 전통적인 문과 숭상 정도인 듯하다. 또한 그 외에 이미 한국에서는 근대교육이 시행·확장되고 있었다는 등 일제강점기 이전의 자체적인 근대화라든지 초기의 일제 지배체제는 당시 한국인의 의식과 수준을 고려하고 반영했다는 것과 같은 언급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전자를 기술하고 있을 뿐 그것이 식민지시기의 과학기술 전개 양상에 끼친 영향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후자에 관한 내용도 문제제기 부분에만 간단히 언급만 될 뿐 본론에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가 연속성으로 제기한 두 요소는 흥미로운 것들이긴 하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듯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고 난 후 국가가 주도해서 과학기술의 습득을 체계적으로 장려·지원할 수 없었다는 점, 정치문제가 선결과제가 됨으로써 과학기술의 사회적 가치나 위치가 당시 한국에서 매우 낮은 편이었다는 점, 따라서 과학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할 세력이 형성되지 않아 학문분야의 제도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 등을 따져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식민지시기 전과 후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요컨대 저자가 연속성을 강조하는 정도에 비해서 단절성이 훨씬 압도적이라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듯이 특정 시기의 여러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와 전후 시기 사이의 연속성을 살펴보아야 함은 분명하다. 우리는 저자가 제시한 것 외에 식민지시기 이전과 그 시기 사이의 어떠한 과학기술적 연속성을 고려해볼 수 있을까?
2. 김근배, “식민지 과학기술을 넘어서 - 근대 과학기술의 한국적 진화,” 『한국근현대사연구』 58집 (2011), 252-283.
필자는 해방 후 한국의 과학기술 양상에 대해서는 이 글로 처음 접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논문에서보다 지금의 논문에서 해방 이후 과학기술의 전개에 대한 더 구체적인 지형을 알 수 있었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식민지 유산을 답습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삼았다기 보다는 큰 폭의 단절된 도약으로 보고 있다. 이 점은 첫 번째 논문에서 식민지시기 전과 그 시기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는 식민지시기를 전후로 해서 이전-식민지시기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연속을, 식민지시기-이후 사이에는 연속보다는 단절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저자는 일제 과학기술 유산 문제에 대해 과거의 과학기술 유산이 새로운 시대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 핵심적 관건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먼저 해방 후 일제 과학기술 유산이 어떤 식으로 존속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지적 차원에서 “새로운 도입경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여전히 일제의 과학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과학기술시스템의 창출과 관련하여 제도적 측면에서 “민족적 과학기술이 허약한 탓에 식민지 과학기술이 여전히 과학기술시스템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으며, 물적 차원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중앙시험소와 지질조사소 등은 신설 연구소에 그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고만 이야기하고 별 다른 자료를 내놓고 있지 않다(pp.264-7). 즉, 일제 과학기술의 유산이 전유·전환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두 시기의 단순 비교를 기술하는 셈이다. 이 점은 저자의 결론이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이 식민지 유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무색하게 할 새로운 과학기술시스템의 출현과 전환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식민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의 당시 전개 양상 혹은 의미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의 정체성(식민지성)을 무엇으로 생각해야 할까? 김근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
안정적이지 못한 사회로 인해 커리어에 장기적으로 투자하지 못하는 것. 믿음이 있어야만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 하지만 믿음 자체가 있지 않은 사회. 그나마 사회가 요구했던 것은 법학과 같은 인문계열. (박물학이라는 분야는 예외: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대 때 연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야. 1.locality 2.우연적 요소(호의적인 일본인들))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라는 용어는 1990~2000대에 창안된 용어(Whiggish). 김근배 교수는 최근에 ‘제도와 실행’이라는 용어로 바꿈.
결국 식민지 시대를 평가할 때 양쪽 측면을 다 고려해 보아야 함.
3. 오선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력시스템 전환: 기업용 대형 수력발전소의 등장과 전력망 체계의 구축,” 『한국과학사학회지』 30권 1호 (2008), 1-40.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휴즈의 기술시스템 이론을 식민지 조선을 사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식민지 조선의 사례를 휴즈가 제시한 미국과 독일의 전력시스템의 대규모 발전시스템으로의 전환과 비교하고 있다. 휴즈에 따르면 미국과 독일은 전시(戰時)라는 맥락에서 국가가 기존 기술시스템의 모멘텀을 주도적으로 극복하려 함으로써 시스템 전환이 가능했다. 한편 저자가 분석한 전력시스템 전환은 국가나 전기사업자가 아니라 전력다소비업체의 자가용 발전소 건설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또한 하나의 기술시스템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전력시스템과 조선의 전력시스템 둘을 모두 극복한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한편 저자는 호리 가즈오(2003)가 제2차 수력자원조사를 기점으로 대규모 전원 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주장과 중대리 발전소 건설을 그 근거로 뒷받침했다는 점을 비판하며 그가 이렇게 분석한 이유가 “저개발 상태인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가정을 분석의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해서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는 “사실”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지금 호리 가즈오가 제2차 수력자원조사와 중대리 발전소 건설의 선후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호리 가즈오가 위에서 기술한 ‘가정’을 분석의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에 선후관계를 잘못 파악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 가정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호리 가즈오가 입수하지 못한 사료를 저자가 입수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저자는 호리 가즈오가 가정에 경도되었다고 비판할 수 없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조금 아쉬웠던 점은 호리 가즈오를 비판하는 8-9쪽에서 저자가 중대리 발전소의 설립 결정일이나 시공 착수일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관계를 지적하고 있는 만큼 확실한 날짜를 밝혀주었다면, 아니면 적어도 제2차 수력자원조사 이전에 중대리 발전소의 설립이 결정되었다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근거는 다른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7쪽에 있는 주석 8번에서 제시되어 있다.
4.
정재정, “근대로 열린 길, 철도,” 『역사비평』 (2005), 221-242.
정진성, “서평: 『일제침략과 한국 철도』(정재정 저)” 『經濟史學』 27권 1호 (1999), 248-251.
앞선 오선실(2008)의 논문을 먼저 읽고 현 논문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마치 전력시스템의 사례처럼 철도 건설의 동기를 단순히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대륙침략정책으로 환원할 수 없는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선실이 지적하는 기존 논문의 한계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간의 식민지 조선의 전력산업에 관한 연구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조치에 초점을 맞추고, 1930년대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과 이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발발 후 군수산업을 보조하기 위해 시행된 전력정책을 주로 분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례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일제의 전력통제정책 아래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저자 정재정이 전해주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도 그 구체적인 양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더 복잡한 문제가 숨어 있지 않을까? 예컨대 저자는 일제가 경부선·경의선을 부설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격렬한 항일투쟁과 반철도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에 더 복잡한 구도가 있지는 않을까? 또한 실제로 철도를 근대문명의 흉기만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인식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저자는 식량수탈 제일주의에서 자원수탈과 군수공업화 우선주의로 전환되어 광공업품 유통이 농산품 유통을 훨씬 능가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 일제의 정책 말고 다른 요인이 개입되어 있진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국 철도의 노선이 단순히 일제의 침략과 지배의 의도에 맞게 배치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또 다른 사회적·경제적인 요인이 있지 않을까?
정재성 교수는 "식민지화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일본이 철도를 설치해 주었기 때문에 발전한 면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듣고 곧바로 반박할 수 없어서 10년 동안 식민지 당시 한국의 철도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일제침략과 한국 철도』이다. (http://www.yes24.com/24/goods/59665?scode=032&OzSrank=1)
전력시스템 - 김경림: 수탈 목적 / 호리 가즈오: 식민지 근대화 / 오선실: 결과적으로 남부에서는 수력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했다(지역적인 불균형).
한국인의 철도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킨 요소 중 하나는 사고 + 토지수탈 등..
노선의 우선성만 가지고는 위에서 언급한 일본인 학자의 말에 반박하기 쉽지 않음. 정재성 교수는 '적재 항목(수송에 대한 항목)'에 주목한다. => 우리가 놓았다면 그렇게 놓지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 그런 점에서 철도는 neutral한 기술이 아니라 식민지성을 지닐 수 있는 기술.
경부선이 어떻게 기획이 되었나? 표준궤를 둘러싼 논쟁? 등을 살펴보면 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음.
4번의 노선 변경에 대한 이유(경제적, 군사적 목적 등) 또한 흥미로운 논의를 마련할 수 있다.
정재정 교수는 마지막 노선이 일제가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절충한 결과로 본다. (거꾸로 생각하면 어느 것도 제대로 만족이 안 되는? 너무 허망하지는 않나? 정말로 그런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노선이었나? 인공물은 항상 unexpected consequence를 낳으니까.)
5. 김성원, “식민지시기 조선인 박물학자 성장의 맥락: 곤충학자 조복성의 사례,” 『한국과학사학회지』 30권 2호 (2008), 353-381.
조복성이 일본인 박물학자와 협력하여 연구를 진행했고 식민지 조선 박물 학계에서 주목받았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이렇게 협력 관계를 맺으며 박물학자로 성장한 것이 조선인 사회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흥미로운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우선 일본인 박물학자와 협력한 것은 그 박물학자 개인의 신념·사상에 따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식민당국, 적어도 당국관련기관이 조복성을 동물학 연구원으로서 남경박물관으로 파견한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저자가 전해주고 있듯이 조복성은 과학지식보급회에서 활동하는 등 조선인 사회에서활동 했는데도 말이다. 또한 일본인과 협력한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사회는 어떻게 그를 받아들였을까? 대중은 ‘이 학자가 잘 되면 나라에도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해도, 그의 협력 배경을 모를 리가 없는 당시 조선인 식자층이 그를 수용한 이유는 납득하기 힘들다. 이것은 필자의 편견 때문일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식민지시기에 적어도 과학에서 만큼은 협력과 민족주의의 구분과 경계가 극명하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고 있지 않다. 아마도 저자가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여기까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6. 이정, “식민지 조선의 식물연구, 1910-1945 : 조일 연구자의 상호작용을 통한 상이한 근대 식물학의 형성”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제 3장, 5장.
비록 주제는 다를지라도 이 논문에서 아마도 김성원(2008)을 논의하는 데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정은 식민지 시기의 일본과 한국의 근대과학기술의 전개 양상을 단순히 일본 과학활동이 “이식”된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현지인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위해 서로 상호협력하며 수행한 “현지활동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박물학자의 사례에서 식민당국관련기관 또한 식민정책을 포함한 더 넓은 의도를 가진 현지의 주체일 것이므로 조복성을 협력 대상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또한 당시 조선인 식자층은 물론 완강한 민족주의적 인물도 있었겠으나 이정이 전해주는 사례처럼 “일제의 문명화 사명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수용했거나(정태현), “제국 및 자본의 이익과 자신의 연구를 조화시키는 데” 별 다른 저항을 느끼지 않은(도봉섭) 인물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복성도 이러한 비슷한 유형에 속하는 인물이었을 수 있다.
한편 식물학에 대한 정태현의 지속적인 노력에 어떠한 소명의식이 필요했음이 분명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좀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만약 그에게 소명의식이 없었다면 지속적으로 겪은 굴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식물학을 연구했을 것이라 보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의 소명의식을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 민족의 “문명화”를 위한 일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규정한다(p.158). 그러나 정태현이라는 인물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를 주제로 더 구체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게 이에 대해 제시한 근거는 해방 후의 회고이며, 저자 자신이 밝히는 것처럼 사적 이유를 미화하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동조적 일본인”이 떠난 뒤 초기 임업시험장에서 정태현이 겪은 굴절은 식민지 사회임을 감안하면 다른 사회보다는 더 커 보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이를 근거로 정태현이 민족의식이 결부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좀 힘들 것 같다.
당시 사람들에게 협력과 민주주의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과학의 중립성을 주장한다면 문제가 된다. 김성원 박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박물학에 한해서. 요즘에는 린네의 식물학과 후커의 생물학 등과 같은 것들이 유럽의 제국주의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있음.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김성원 박사의 논문은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친일적인 행각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연결망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당시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와 ‘과학의 중립성 주장’은 다른 차원의 명제.
김성원 박사의 논문을 보면 조복성과 일본 학자들의 관계가 거의 동등한 것처럼 보임. 조복성이 과학지식보급회 등에서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를 잘 보여주지 않음. 단순히 했다는 것.
이정 박사는 정태현과 일본 학자와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음. (식물 명명, 나카이가 정태현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실은 것들 등...)
이정 박사의 글에서는 김근배 교수가 잘 보여주고 있는 식민지성(진로 확장 불가능)이 잘 드러난다.
내용 발제 15분 (읽었다고 가정.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가질 수 있게)
토론할 거리가 아니라 내가 파악한 논문의 무엇?? 재밌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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