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학기술정책 및 인물(3): 전상근, 최형섭, 오원철
전상근, 『한국의 과학기술 개발 – 한 정책입안자의 증언』 (삶과 꿈, 2010[1982]), pp. 139-198. (과학기술처, 기술인력)
최형섭, 『開發途上國의 科學技術開發戰略: 韓國의 發展過程을 中心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1980), 제 1부, pp. 118-157. (한국의 경제정책 + 과학기술정책)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동서문화사, 2006), pp. 135-205. (중화학공업)
1. 전상근, 『한국의 과학기술 개발 – 한 정책입안자의 증언』 (삶과 꿈, 2010[1982]), pp. 139-198. (과학기술처, 기술인력)
필자는 전상근(2010)의 글을 통해서 현재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입안자 및 관련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시행되고 있는 여러 정책 등의 역사적 기원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저자의 글에서 ‘과학’이라는 용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기초연구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 대신 ‘공업’이나 ‘기술’, ‘기능’ 등의 국가의 수익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단어들만 내리 등장할 뿐이다. 당시 과학기술정책 입안자들은 부국강병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수출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라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과학기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과학 그 자체의 육성보다는 수익에 바로 직결되는 분야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현재 정책을 수립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더 공부해 보아야 알겠지만, 6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설정된 과학기술정책의 기조가, 크게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점은 현재 시행되고 있는 기술고시나 각종 기술자격 제도도 그 시기부터 (정확히 말하면 74년)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가 기술 자격법’의 강력한 추진은 과학기술자들에게 특정 분야의 진입만을 허용하는 일종의 ‘표준’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을 응시하려는 사람들은 그것에 맞춰 교육받아야 하고, 그것에 맞춰 생각하고 답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이 제도는 과학기술자의 업적을 보고 자격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의 기준을 달성한 자에게만 수여하는 제도이다. 당시의 이 기술자격 제도의 영향으로 현재 자주 지적되는, 과학기술 분야의 다양성이 결여된 현상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전에도 각종 기술자격법은 존재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거시적인 과학기술정책(중화학공업 진흥 정책) 속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력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표준’으로 기능한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국가 기술 자격법을 둘러싼 다른 입장. 최형섭-생활의 과학화 일환. 오원철-중화학공업 개발 계획 인력양성 문제. 전상근-기술자의 사회적 지위 향상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전상근과 최형섭의 상이한 입장. 최형섭-과학적 토양의 중요성 강조. 전상근-과학자를 기술자에 포함.
사농공상만으로 기술자 천시 풍토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일제시대 교육제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경제학의 경우 이른 시기(1921년 경성제대)에 학과가 설립되었다. 당시 과학기술자들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이런 전통에 속한 관료들이 이른바 '쟁이'를 천시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 때도 경제를 공부한 관료들이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공무원들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공무원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승진하기 위해 '안'을 낸다. 안이 받아들여지면 법률위원회를 통해 법적인 근거를 따져야 한다(바로 이 단계가 과학기술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 하는 단계이다!). 근거가 없을 경우 법 제정(의회를 상대로 설득). -> 일을 어떻게 추진하는가에 주목해서 글을 다시 읽어볼 것.
1차 사료는 한 구절 한 구절 꼼꼼히 읽어야 한다. 도표가 단계별로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전상근의 과기처 안 -> 무임소장관의 안 : 원자력원->원자력처, 집행 성격이 계획부처의 성격으로, 차관부 사라짐, 연구조정관실이 분리(밑에 아무 부도 가지고 있지 않음. 공무원 조직에서 실제로 아무 힘을 가지지 않은 조직이라는 의미).
-> 총무처 안 : 과학기술원->과학기술처(가장 낮은 장관 지위) 등...
KIST는 왜 빠졌을까? 과학계가 반대해서 빠졌다. 자율성을 잃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최형섭, 『開發途上國의 科學技術開發戰略: 韓國의 發展過程을 中心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1980), 제 1부, pp. 118-157. (한국의 경제정책 + 과학기술정책)
다른 저자의 글과 마찬가지로 최형섭(1980)의 글에서도, 후진과 빈곤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근대화가 되어야 하고, 근대화를 위해서는 국가 주도의 장기적 계획, 단계적 개발전략 추가 라는 생각이 두드러진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글에서 STS를 언급하며 뜬금없이 한국과학기술사를 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읽어보니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세종시기의 과학기술의 발전 원인이 “정치적 지도력과 능력의 조직화”라고 이야기한다. 마치 60년대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의 주요 원인이 국가 주도의 과학정책 수립에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듯하다. 과거에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기에도 국가가 주도했으므로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식이다. 이러한 기조는 이후 내용에서도 계속된다. 예컨대 19세기에 서양문물을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던 시도가 삼국(한국, 일본, 중국) 모두에 있었으나 일본에서만 성공적이었던 이유를 저자는 “정치적인 리이더쉽”으로 꼽는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쇄국정책, 식민지화, 한국전쟁 등의 이유로 그 동안 진정한 근대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지만, 1960년대 들어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 주장은 이른바 한국형 휘그적 역사관이라 볼 수 있겠다.
최형섭 : 연구자에서 정책가로 된 인물. 원자력 연구소 소장. KIST 초대 소장,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
과학기술의 발전이 경제발전에 직결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좀 이상하다? 당시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이었다. 이는 외국에서 빌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머리 속에서는 자본만 있다면 얼마든지 한 나라의 경제를 크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다. 한국뿐 아니라 7-80년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핵심을 이루는 변수에 기술은 없었다. 최형섭의 주장은 당시 경제관료들에게 아주 낯선 사고방식이었다. 지금도 주류 경제학에서는 기술이 주요한 변수가 아니다. 슘페터리안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 패러다임에서는 낯선 branch.
최형섭이 생각하는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 이유 : 1) 하나의 산업을 주력으로 할 때, 다음 단계도 동시에 시행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사실. 그렇다면 중화학 이후는? 그 다음 스테이지는 무엇인지 모른다. 지금도 현재에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굉장히 불안해 한다. 2) 적극적 기술 수입+독자기술역량 확보 병행. KIST와 인도 농업연구소 비교에서 두드러짐. 인도는 고유한 기술들을 자체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정체됨. 세종대왕은 중국의 기술을 수입함에 그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60-70년대의 과학기술의 역사 이해 : 1) 김근배 : 60년대까지는 과학기술이 중요하지 않았다. 2) 문만용 : 66-67년 사이에 한국에서 과학기술 붐이 있었다. (KIST, 과학기술처 등의 담론이 폭발하듯이 일어남) 하지만 KIST 초기에는 산업 발전이 도움이 된 연구를 별로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김근배 교수도 이에 동의)
하지만 당시 정책 입안자들이 KIST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상충되는 두 현상(해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최형섭의 프레임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6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에 주력할 때가 아니었지만, 최형섭이 이야기한 한국의 과학기술 역량(우리 자체의 역량)을 쌓는 데 KIST가 일조했을 수 있다.
최형섭과 오원철 비교는 김미화의 논문을 참조할 것.
3.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동서문화사, 2006), pp. 135-205. (중화학공업)
전상근의 경우처럼 오원철(2006)의 글에서도 기초과학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오원철이 전하는 박정희의 지시, 즉 ‘방위산업건설계획’, ‘100억 달러 수출계획’,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에서도 그러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특기할 점은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방위산업과 긴밀히 연계하여 발전시킬 것을 계획했다는 점이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표리일체”이며, 따라서 “중화학공장은 평화시에는 산업기계를 만드는 곳이고, 비상시에는 병기가 나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과학정책 수업에서 배운 과학기술의 발전 모델 중 하나인 G. Tassey의 Technology-Element Model이 떠올랐다. 이 모델은 ‘기초연구 → 응용연구, 개발’의 도식으로 표상되는 기초적인 선형 모델을 보완한 것으로서, ‘기초연구 → 원천기술연구(Generic Tech. Research), 응용연구, 개발’의 도식으로 그려진다. 원천기술이란 특정한 제품만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제품 산출에 적용될 수 있는, 즉 ‘범용성’에 강조점을 둔 기술이다. 이 모델은 특히 한국에서 각광받았다고 한다. 기초연구 전통이 없었으므로 Generic Research을 통해 그 이후 단계인 응용연구와 개발 모두의 성과를 이룩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추진했던 당시의 정책은, 중화학공업을 통해 그것의 진흥과 방위산업의 안보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Technology-Element Model과 닮았다. 이 유사성은 박정희 정부가 추구했던 과학기술의 이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즉, 그것은 비록 기초연구가 아니더라도 범용적인 적용 범위를 가지고 있는 원천기술연구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0월 유신을 평가함에 있어서 (일단 유신체제를 혁명과 개혁으로 규정하는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체제개혁'뿐만 아니라 ’혁명과업‘이라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 또한 흥미로운 점이다. 혁명과업은 1·12선언, 즉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국민의 과학화 선언을 의미한다. 만약 저자의 주장대로 10월 유신을 중화학공업을 진흥하여 수출강국을 만들기 위한 일부 과정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서 헌법까지 바꿀 수 있다는 무지막지한 권력으로서의 과학관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권력의 유지까지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적어도 정부의) 과학관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 주도의 과학기술개발 타당성? 우선 어떻게 선택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1) 기미야 다다시 : 수출지향형 공업화 정책을 선택한 것은 미국의 반대로 인한 최초의 군사 정부 기획과는 정반대의 지향점. 2) 이병천 : 중화학공업 체제는 반드시 유신독재를 수반하는가? 타이완 개발독재 모델과 비교.
오원철과 최형섭이 강조한 국가의 역할 차이점 : 1) 오원철-전쟁 담론(사실 박정희의 담론). 제2의 6.25. 우리가 하는 것은 전쟁이다. -> 10월 유신 정당화. 전쟁 담론이 북한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 최형섭 : 과기부라는 특정 부서와 관련되어 있었던 인물. (보수적이긴 했지만) 박정희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진 않았ㄷ.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은 왜 필요했을까? 없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왜 하필이면 10월 유신과 함께 등장했을까? 이데올로기적 역할? 문화적으로 동원해서 새마을 운동과 연계?
우리의 발전과 문제는 박정희 시대에 어느 정도로 뿌리박고 있을까? 이는 제대로 평가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다. 정성적으로 접근하여 다른 가능성의 공존을 따지면 될 텐데 쉽지 않다. 아직 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대해 결론을 낼 정도로 알고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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