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 강점기의 배경(1) - 식민지 사회와 문화 속의 과학
정선아, “과학데이(1934-1936)의 스펙타클: 일본 식민지시기 특정 과학관의 공공성 획득을 위한 절충적 전략” 『인문사회 21』 5권 2호 (2014), 79-95.
정인경, “은사과학기념관(恩賜記念科學館)과 식민지 과학기술” 『과학기술학연구』 5 (2005), 69-95.
임종태,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17권 2호 (1995), 89-133.
김성연, ““나는 살아 있는 것을 연구한다” - 파브르『곤충기』의 근대 초기 동아시아 수용과 근대 지식의 형성“ 『한국문학연구』 44집 (2013), 139-177.
한민주, “인조인간의 출현과 근대SF문학의 테크노크라시 - 『인조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5권 (2012), 417-449.
Jung Lee, “Invention without Science: 'Korean Edisons' and the Changing Understanding of Technology in Colonial Korea,” Technology and Culture 54, no. 4 (October 2013): 782–814.
1.
정선아는 단순히 민족운동의 한 성과로서 과학데이의 의미보다는 그것이 가진 ‘시각적 재현과 유포방식’의 의미를 도출하고 있다. 또한 그는 1930년을 전후하여 발간된 대중신문의 과학관련 기사를 통해서 대중들을 대상으로 형성된 과학의 관념을 살펴보고, 이를 과학데이 및 <과학조선>에서 표방하는 과학과 비교하고 있다.
1930년대 초 이전에 형성된 대중들의 과학 이미지는 한 마디로 ‘환상’이자 ‘일상의 모든 것’으로서의 과학이었다. 당시 과학관련 기사는 야만·미개와 과학문명을 대비하거나 각종 합성사진과 일러스트를 제시함으로써 ‘환상적인’ 볼거리인 과학 이미지를 재현했다. 또한 과학적 태도가 지향되는 사회 흐름과 매체를 통해 보급되는 과학지식은 ‘일상의 모든 것’에 과학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과학조선>에서는 매우 특정한 과학을 가리키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주로 볼 수 있다. <과학조선>은 ‘실제적인 가능성’을 기준으로 과학을 선택했고, 일상과 상대적으로 분리시켜서 과학기술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재현했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와 이후 과학데이에서 드러나는 과학 이미지의 전략적인 이용 및 유포방식 사이의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 발명학회의 최종 목표가 ‘전문적 과학연구소 설립’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발명학회는 당시 대중의 과학 관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결고리를 필요로 했고, 그에 따라 과학데이에 사용된 이미지와 유포방식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미 서구에 의해 성취된 산업 발명품을 사진으로 제시하지 않고 화려한 색감과 함께 역동적인 방식으로 도안화하였다. 그리고 비행기를 사용해 삐라를 배포하거나 자동차를 이용한 가두행진을 펼치기도 했다. 한편 저자는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과학상을 대중들이 제대로 파악하고 수용했는지는 미지수라고 덧붙인다. 전문가들에게는 첨예하게 다른 과학관이 대중들에게는 모두 그저 하나의 환상적인 ‘과학’이었고, 그 속에서 발명학회의 ‘실제적인 가능성’으로서의 과학관은 희석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과학조선에 실린 이미지나 과학데이에서 사용된 여러 가지 시각적 재현과 그 유포방식이 발명학회의 과학기술관(‘산업으로서의 과학, 실제적 가능성으로서의 과학’)과 대중의 과학기술관(‘상상의 과학’)을 절충하는 방식이라는 해석에는 수긍이 간다. 하지만, 발명학회의 최종 목표가 전문적 과학연구소설립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산업으로서의 과학 이미지를 서구에 의해 성취된 구체적인 산업 발명품으로 내놓았다는 저자의 설명에는 의구심이 든다. Jung Lee(2013)에 의하면, 김용관을 위시한 발명학회 집단이 설립하려고 했던 전문연구소는 서구에 의해 성취된 최첨단의 발명이 아닌 실생활을 이롭게 하는 좀 더 작은 범위의 발명을 지원·육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학 운동의 일환으로 그와는 다른 최첨단의 산업 발명품을 재현한 이유는 아마도 발명학회 내의 사회명사들이 가진 문화적 과학화 이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정인경은 은사기념과학관(이하 ‘과학관’)의 사회적 성격과 일제에 의해 이식된 식민지 과학기술의 성격을 여러 측면에서 살피고 있다. 여기서 그가 이야기하는 과학기술은 중립적이며 근대적 가치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보다 문화적인 가치를 함유한 것이다.
우선 과학관은 과학교육을 위한 과학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수준이 낮은, 사회교육에 더 큰 비중을 둔 ‘통속교육관’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사회교육의 장려라는 천황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여 설립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둘째로 과학관은 과학적 이론이나 방법론을 다루는 기관이라기보다는 ‘첨단 산업홍보관’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일제가 과학관을 일제의 식민지 개발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활용했기 때문이다. 즉 식민지 개발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개발을 이끈 지배권력의 정책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최근의 첨단산업(주로 산업기술)을 소개 및 전시하는 데 과학관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일제는 과학관을 통해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를 선전/주입하였다. 서구의 인종차별주의를 각색하여 일본인을 우생학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고, ‘믿거나 말거나’하는 이야기로 일본의 과학을 과시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일본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한 것이다. 넷째로 이와 같은 목적의 연장선에서, 인쇄물 발간을 통해 조선의 자연과 생활을 수치화 및 자료화하여 식민지 지배에 이용했다. 또한 과학관은 ‘일상생활과 관계 깊은 과학지식’을 앞세워서, 일제의 기준에서 서구의 것을 재구성한 식민지의 ‘근대적 규율’을 조선인에게 체득시키고 동시에 그들을 식민지 지배체제에 길들이는 기능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전시동원체제에서 과학관은 군사훈련에 관한 새로운 전시물을 제작하고 각종 강습회 등을 기획하여 노골적인 정치선전과 군사훈련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는 과학기술을 도구화하여 일제의 파시즘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더 나아가 사상적 공세가 강화된 ‘과학동원’은 “일본적 과학”이라는 것을 내놓아서 일제의 정치적·사상적인 본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인경은 위와 같이 은사기념과학관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이 과학관이 서구의 “박람회와 박물관의 정치학”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서구가 ‘문명’과 ‘진보’라는 표어를 앞세워 박람회와 박물관 등의 사업으로 식민지를 착취했던 것처럼, 일제 또한 그것을 아시아 주변국을 대상으로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일제가 과학관을 통해 재현하려 했던 과학관(科學觀)에는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라는 문화적인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자들에 의해 ‘문명’이라는 의미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과학의 객관성은 상실되었다는 점 또한 지적한다.
3.
1930년대 중반의 과학운동은 김용관과 발명학회가 0민족의 독자적 공업화’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발명의 진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분야의 사회명사들을 영입하여 도움을 받고자 하였으나 그로인해 다른 이념과 노선이 유입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따라서 이후에 과학운동의 중심노선과 이화학연구기관의 설립방향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고, 결국 문화적 과학운동노선이 득세하는 등의 이유로 연구기관 설립은 실현되지 못했다. 임종태는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운동과 이화학연구기관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와 그에 따른 대립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발명학회가 ‘발명의 진흥’에서 ‘과학의 대중화’로 노선을 변경한 듯 보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과학기술관 간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과학기술관 간의 차이점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사회명사들의 진영과 김용관을 위시한 발명학회의 진영으로 양분한다면, 전자는 보편적·중립적 과학기술관을 가지고 있었고 후자는 거기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으나 더 나아가 ‘조선적 과학기술진흥론’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명사들의 진영은 좀 더 복잡하게 세분할 수 있다. 정리하면 ‘계몽적 과학대중화 우선론’, ‘자연과학 수용 기관 설립론’, ‘외세의존적 근대화론’ 등이다. 필자는 이렇게 이화학연구기관 설립 문제에 대한 저자의 논의를 읽으면서 사태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정선아(2014)에서는 기관 설립 문제를 두 진영(김용관을 위시한 발명학회 간부 / 비전문가였던 사회명사들)의 대립 구도로 파악한다(91쪽). 반면 임종태는 문제를 둘러싸고 상당히 다양한 입장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논쟁을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로 보았을 때 누락할 수 있는 요소가 항시 있고, 이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한편 저자는 이화학연구기관 설립 논쟁 문제에서 더 나아가 1938년 이후 군국주의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과학기술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분석한다. 보편적·중립적 과학기술관은 계속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지 않았고 친일적 정치이념과 결합하여 일본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저자의 논의는 보편적·중립적 과학기술관이 단일하고 고정되어 있는 관념이 아니라 또 다른 사상·이념과 결합해서 항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동적인 관념임을 보여준다.
4.
근대 초기 파브르의 『곤충기』는 ‘과학’의 이름으로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으나 이데올로기를 가진 독자들에게는 사상적으로 독서되며 다양한 사회 체제 및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김성연은 『곤충기』의 수용사를 통해 서구에서 유입된 과학 사상이 동아시아의 근대 지식을 형성한 구체적인 경로와, 그것이 동아시아 지성과 교양이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있다.
우선 20세기 초 조선 지식인들은 파브르의 ‘서벌턴적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공명했으며, 조선인 자연과학자들과 학생들에게 매일의 관찰과 기록이라는 실천을 통해 일상의 과학화를 행하도록 자극했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도 비록 지식인 주체의 사상과 실천의 차이에 따라 그 방점이 달라지긴 했지만 일상의 과학화를 꾀한 것은 똑같았다고 저자는 밝힌다. 한편 『곤충기』는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검열의 관문을 넘어 사회적·사회적 메시지의 원천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어떤 주의나 사상도 그것과 동화될 수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자연에 관한 서술은 “정치의 시녀”였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글을 읽으면서 강하게 느꼈던 점은 저자가 파브르의 반대항에 오스기 사카에, 루쉰, 홍명희와 같은 정치사상가를 두어 두 진영을 대립시킴으로써 파브르 과학의 비정치성, 순수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정치적 지식인들이 비정치적 텍스트를 손에 들게 될 때, 이들의 만남은 새로운 의미망을 창조해낸다”거나 “그의 기록은 결국 또 다른 신화에 활용되고 말게 된다”고, 그리고 “‘문학적’으로 서술된 ‘과학 서사’가 생명정치적 색을 입게 되는 과정을 선명히 보여주었다”고 기술하는데, 이는 저자가 과학 자체를―또는 적어도 『곤충기』의 과학 서사 자체를―객관성·중립성을 담지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니면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비정치적 텍스트’, ‘생명정치적 색’이나 ‘또 다른 신화에 활용’라는 용어 및 어구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 하다. 저자의 의도가 이해는 된다. 그는 결국 한중일이 각기 『곤충기』를 독해한 과정을, 과학 이론이 곧 윤리학과 등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성적 결론이 질문과 반성 없이 규범적 도덕이 되어버리고 마는 과정으로 규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파브르의 과학이 그토록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파브르는 곤충의 본능에 대한 관찰 결과를 무리해서 인간의 본능 이해에 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저자가 기술하는 것처럼 파브르는 곤충을 관찰한 결과로 평등과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기반인 사업의 본성을 비판했다. 하나의 대상을 근거로 사상을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역으로 비판하는 것은 주장하는 바는 다를지언정 근거로부터 가치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행위이다. 만약 파브르의 서술에 담긴 의도가 곤충 관찰 결과를 근거로 하는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면 나의 비평은 빗나간 것이겠지만, 저자가 이러한 점을 짚어주지 않고 ‘파브르의 과학은 정치적으로 이용됐다’라는 식의 기술을 반복·강조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한편 저자는 『곤충기』가 식민지 시기 조선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조선어 번역본의 있지 않았던 탓에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며 대신 최초로 번역본이 발간된 해방 이후로 시기를 옮겨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논의를 통해 같은 시기의 중국과 일본의 구체적인 유입 경로는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에 대한 논의의 부재가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필자는 이번 독서 과제 중 하나인 한민주(2012)를 통해 과학지식이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지식 자체로서 접근하기 이전에 상상과 유추 과정으로 대중에게 먼저 유포되고 받아들여졌음을 배웠다. 이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곤충기』는 철학적 사유와 해석, 예술적 수사가 곁들여진 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당시 문학가들을 매료했다는 점에서, 과학과 문학의 거리를 그리 멀지않게 느끼고 있던 당시 식민지 조선인에게도 그것이 잘 동화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5.
한민주는 식민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기반으로 한 맑스의 유물사관에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으로 사상적 방향을 전환하는 경향의 길목에 있던 SF장르, 특히 박영희가 번역한 『인조노동자』가 당시의 과학담론 속에서 어떻게 의미화되었는지 분석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당시 인조인간에 대한 관념이 민족성에서 더 나아가 계급성과 젠더를 투사하도록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과학이 계몽의 대상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렇게 타자를 구성하는 담론으로 기능했던 인조인간은 곧 문학적으로 재현되었다. 당시 재현물 중 하나인 『인조노동자』는 박영희의 이해 속에서 노동자 계급과 젠더라는 ‘타자 영역의 전복성’이라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한편 근대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은 노동을 상실하고, 이것은 사회에서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등장함으로써 식민지 대중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간학을 정립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여덜뫼는 『인조노동자』의 에필로그에 주목하여 그것을 크포로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이론틀로 뒷받침된 ‘사랑’을 통한, 완전한 세계 개조의 혁명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인간과 인조인간을 구분하여 새로운 인간학을 정립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 작품이 유토피아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작품에 반영되어 있던 상호부조론의 유토피아성이 크로포트킨의 ‘과학기술유토피아’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논문의 주된 흐름이 『인조노동자』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다. 정말로 식민지 대중은 그 작품에서 크로포트킨의 과학기술유토피아를 도출했을까? 크로포트킨 본인의 유토피아가 아닌 당시 조선 대중의 유토피아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어쨌든 저자는 1920년대 과학기술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은 1930년대 ‘테크노크라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음을 밝힌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당시 조선의 테크노크라시주의자들이 경제조직뿐 아니라 도덕까지 그것에 적응하도록 개조되어야 할 것을 역설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이 무의식적으로 특정한 도덕적 관점을 사람들에게 부여할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에 맞춰 도덕을 그에 적응시키려고 한 의도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6.
Lee는 1920-30년대 식민지 한국에서 자수성가한 발명가들과 그들이 발명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형성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과 ‘발명’이라는 용어는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 한국에서 굉장히 새로운 개념으로, 서구 문명의 “위대한” 성취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소위 ‘자수성가 발명가들self-made inventers’과 그들의 작업을 보도하는 언론 매체에 의해 용어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나갔다. 당시 한국인들은 발명이 일상적인 것이고 그것을 하는데 최신 기술과 과학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발명을 이해했던 것이다.
한편 저자는 자수성가 발명가들이 김용관의 과학기술관에 미친 영향 또한 살피고 있는데, 여기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원래 김용관은 기술은 이론 중심적이어야 하며("linear model of technology and science") 과학기술은 사회와 무관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식의 과학기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목적은 전문연구 인력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수성가 발명가들을 만나고 지원하게 되면서 그의 과학기술관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동화된다. 기술(발명)은 과학과 거의 무관하게 발전될 수 있고 (기술이 과학 발전을 촉진하기도 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의 성장과 함께 진행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필자는 특히 이 부분의 논의가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소통의 귀재’로서의 김용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화학연구기관 설립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조율할 때뿐만이 아니라 자수성가 발명가들을 만났을 때에도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수하지 않고 소통을 통해 그 생각을 계속해서 바꿔 나갔던 것이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과학데이 개최의 동기를 마치 과학기술 발전(김용관이 이해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선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김용관의 통찰만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799쪽). 그러한 통찰 또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요소겠지만, 발명학회를 유지·확장하기 위해 영입한 사회명사들의 ‘문화적 과학화 이념의 유입’ 또한 무시해서는 안 될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임종태(1995)에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저자는 대중과 언론이 과학·발명을 그가 기술한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자수성가 발명가들의 출현 이후 모든 식민지 한국인들이 생각을 바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도 아쉬운 점이다. 정선아(2014)에 의하면 그들이 출현한 시기 이후에도 (심지어 과학데이 개최 이후에도) 일종의 ‘공상적인 미래상’ 또는 ‘구경거리’로서의 과학·발명 이미지는 계속 등장했던 것이다.
<생각해볼 거리>
크로포트킨. 자연에서 moral principle을 찾으려는 노력 중 하나. (사실의 영역에 근거한 도덕)
흔히 과학철학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부르며 경계한다. (is vs ought to)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 절반 도덕 책?
그렇다면 도덕적 원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자연에서 찾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결국 자연에서 찾는 것이 유효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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