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학사/한국현대과학사

7. 연구 및 교육 기관

7.

연구 및 교육 기관


고대승, “원자력기구 출현과정과 그 배경,” 한국과학사학회지14(1) (1992), 62-87.

John DiMoia, “Atoms for Sale?: Cold War Institution-Building and the South Korean Atomic Energy Project, 1945-1965,” Technology and Culture 51(3) (2010), 589-618.

문만용, “KIST에서 대덕연구단지까지 - 박정희 시대 정부출연연구소의 탄생과 재생산,” 역사비평85 (2008), 262-289.

박진희, “연구자 집단의 성장과 변천-정부출연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김환석 외 편저, 󰡔한국의 과학자 사회: 역사, 구조, 사회화󰡕 (궁리, 2010), 183-219.

Dong-Won Kim and Stuart W. Leslie, “Winning Markets or Winning Nobel Prizes?: KAIST and the Challenge of Late Industrialization,” Osiris 13 (1998), 154-185.

강기천, “한국 과학재단의 설립과 대학의 기초 연구, 1962-1989”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1. 고대승, “원자력기구 출현과정과 그 배경,” 한국과학사학회지14(1) (1992), 62-87.

고대승(1992)은 원자력원이 설립된 당시 한국의 과학기술계 실태, 설립주도자들의 의도 등 한국의 입장과 미국의 핵확산 정책과 같은 미국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원자력원이 설립된 배경과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논의는 당시 원자력사업을 향한 정부 관료들의 시선이 원자력 사업의 성공이 국내의 모든 분야의 후진성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과 기대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미간의 원자력협정이 한국에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체결된 점, 인력확보 정책을 시행했으나 후속조치가 미비하여 두뇌 유출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는 원자력 사업 5개년계획안과 원자력학술회의의 내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정부 관료들은 원자력 사업을 통하여 원자력과 관련 없는 분야까지 발전시키려 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전반적인 과학기술 수준과 공업, 농업 등의 생산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원자력 산업만으로도 전반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고, 과학기술의 도입은 국내의 수준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과학계의 지적도 있었다. 비단 국내뿐 아니라 세계원자력 기구로부터도 우려가 표명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원자력사업이란 일종의 마스터키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미간의 원자력협정인 가조인되고 한국의 관료와 과학기술인이 제네바 국제회의에 참석한 뒤 한국의 원자력 연구개발이 비공식적인 스터디 그룹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의외였다. 어떠한 이해관계가 있었길래 정부는 직접 주도적으로 원자력 연구개발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 그러한 주요 사안을 스터디 그룹에 맡겼던 것일까? 심지어 정부는 문교부 기술교욱국내에 원자력과를 19563월에 신설했지만 과장을 공석으로 남겨둔 채 직원 몇 명만 채용해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56년부터 원자력 연구생을 해외로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시작했으나 사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두뇌 유출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저자의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정부의 태도는 일견 비일관되어 보인다. 정부는 확실히 원자력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원자력과는 설립 초기에 문제가 많았으나 연구생을 파견하여 인력을 확보하려 했고, 원자로 구입 비용을 포함한 파격적인 금액의 예산을 확보했던 것이다. 원자력에 대한 정부의 높은 관심과 지지부진을 넘어서 무관심해 보이는 일처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한 부분적인 답은 DiMoia(2010)가 제공하고 있다.


2. John DiMoia, “Atoms for Sale?: Cold War Institution-Building and the South Korean Atomic Energy Project, 1945-1965,” Technology and Culture 51(3) (2010), 589-618.

DiMoia(2010)는 이른바 평화를 위한 원자력정책의 수행을 한국의 사례연구를 통해 재조명하고 있다. 당시 한국이 원자력 기술과 교육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루려고 한 다양한 목적을 살펴봄으로써 AEC의 원조 프로그램의 목적에 대해 더욱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당시 한국의 원자력 관련 담론을 주도했던 박철재와 윤세원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원자력을 응용하여 전력복구사업을 진행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의 협상 상대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비록 부지 선정과 원자로 선택은 그들의 뜻대로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승(1992)의 논의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첫째로 고대승은 유학생 파견 정책이 일정 부분 성과를 얻기는 했으나 무엇을 학습시킬 것인지에 대한 사전 계획이 없이 보냈기 때문에 원자력 분야보다는 한국의 과학기술 전반의 인력개발로 탈바꿈해버렸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DiMoia는 이후 취득할 원자로 기술에 대해 유연한 접근을 하기 위하여 그러한 전략을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미국이 주된 협상 파트너였음에도 계속해서 유럽과 일본으로 유학생을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원자력연구소가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원자력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이 1960년대 초반에 다른 과학기술 연구도 전반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새로운 정부 아래 변화하는 정치적 환경의 맥락 속에서 보고 있다는 것도 고대승과 의견을 달리 한다. 이러한 DiMoia의 논의는 필자가 고대승(1992)에 대해 언급했던 질문의 답을 부분적으로 제공한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로 고대승은 한국 측이 원자력 이용의 가능성만을 믿고 지나칠 정도로 성급하게 일을 추진하여 안전문제를 한국에 떠맡기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협정 수정안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본다. DiMoia는 이와 달리 박철재가 서울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안양을 부지로 삼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가 부지 선정 문제에 대해 전력생산 가능성과 원자력의 안정성을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렇게 원자력과 관련된 당시 논의 과정은 미국과 한국 정부가 일방적인 하향식으로 청사진을 제시하고 계획을 추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의 관련 행위자들, 특히 과학기술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절박한 필요로 인해 인력과 전문기술을 축적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DiMoia의 글은 특히 원자로 부지 선정의 역사를 새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한미의 의견이 서로 달랐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승은 너무 간단히 언급한 감이 있다. 

초기 원자력 역사 : 동상4몽? 미국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왜 원자로를 대학과 같은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설치하려 하는가였다. 이는 한국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있다. 상공부는 원자력이 전력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한국 관료제 안에는 문교부와 원자로를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이 있었다. 당시 서울대는 문교부 직할이었다. 이러한 내부 사정을 모르는 미국은 이해하지 못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당장 만들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핵폭탄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비밀스럽게 두려했던 면도 있었다. 결국은 서울 공대 근처로 정해졌다.

스터디 그룹? 최초의 케이스. 윤세원의 스터디 그룹은 국내 연구자들로 채워졌다. 원자력연구소 1급 자리를 두고 윤세원의 스터디 그룹과 최형섭의 파이 그룹 간의 경쟁이 펼쳐졌다. 파이 그룹은 모두 미국 박사들로 채워졌었다. 이는 국내파와 해외파의 첫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윤세원의 장내원의 논쟁도 흥미롭다. 박익수-이창건 논쟁도 있었다. 박익수 선생의 주장 : 원자력연구소는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과학자들도 참여해야 하고, 훨씬 더 공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많은 논쟁이 지금 한국과학기술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할 것.

 

3. 문만용, “KIST에서 대덕연구단지까지 - 박정희 시대 정부출연연구소의 탄생과 재생산,” 역사비평85 (2008), 262-289.

문만용(2008)은 박정희 시대 정부출연연구소의 탄생과 재생산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가치중립적이라 여겨지는 과학기술을 다루는 정책에도 정치적인 논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시도하고 있다.

대체로 같은 주제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박진희(2006)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학기술 정책 속 정치적인 논리의 작용을 보이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논문의 보충으로 읽을 수 있었다. 문만용은 이와 관련하여 미국이 한국에 연구소 설립을 제안한 이유, 출연연들은 기본적으로 계약연구체제를 채택했지만 계약과 무관하게 정부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음으로 정부와의 관계는 계약보다는 동원에 가까웠다고 평가되기도 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특히, 과학기술자들의 바람은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기술을 진흥시키는 것이었으나 정부는 이를 기술자립으로 수렴했다는 저자의 지적을 통해서는 당시 출연연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과학자 사회의 특징을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은 현신규의 사례를 생각나게 한다.) 애초에 박정희 정부가 20여 년이 지나 그들의 목소리에 응했던 이유가 과학기술 자체의 진흥이 아니라 경제개발을 뒷받침하는 기술을 확보하고 방위산업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 당시 정부에게 정부출연연구소는 단순한 연구 기관이 아니었으며 정치력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었던 것이다.

1976년 전후 정부출연연구소 설립이 급증하는 상황에 대한 저자의 논의 또한 위와 같은 목적에 용이하다. 그에 의하면 상황은 다소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수의 증가 때문에 재원확보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연구소는 산업기술 개발에 편중되어 있어서 기초학문에 대한 상대적인 경시 풍조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연구소들은 KIST의 독특한 운영방식, 즉 법적으로 재단법인이며 계약연구체제를 채택하여 산업기술을 연구하는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였는데, 이는 당시 KIST는 막강한 정치력을 업고 있었기 때문에 공과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평가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4. 박진희, “연구자 집단의 성장과 변천-정부출연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김환석 외 편저, 󰡔한국의 과학 자 사회: 역사, 구조, 사회화󰡕 (궁리, 2010), 183-219.

박진희(2006)는 한국 과학자 사회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 소속 과학기술자들이 어떤 성장과 변천 과정을 겪어왔는지를 해방직후 중앙공업연구소 시기부터 출연연의 새로운 위상 정립 논의가 한창이었던 90년대 말까지 살펴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KIST를 기점으로 연구자 집단은 양적으로 성장했고 사회적 위상 또한 높아졌다. 이후 KIST를 모델로 한 정부출연연구소들이 급증했고 소속 연구원들은 긍정적인 국가관을 가지고 그들의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인해 80년대 중반부터 정부의 출연연 관리가 강화되어 연구소의 자율성과 처우가 상대적으로 빈곤해짐으로써 70년대와 같은 국가주의는 찾기 힘들어 졌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흥미로운 점은, 명시적이진 않지만 저자가 정부 출연 연구소가 출현하여 과학기술연구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그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을 때를 극댓값으로 취급하고, 그 이전을 본래적인연구 집단의 형성 전 시기로, 그 이후를 과학기술연구와 그 집단의 쇠퇴 과정으로 묘사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일부 언급했듯이, 그는 출연연제도가 연구소의 안정화에 기여하여 결과적으로 연구 개발 활동 촉진했으며 종합연구소의 기반을 다졌고, 과기처 설립 이후 산업경제정책과 연관을 맺으며 산업기술개발 종합연구소로 성장함으로써 연구소의 자율성과 좋은 처우 및 지원이 보장되었고 덩달아 사회적인 인정까지 확보되었다고 평가한다. 그에 반해, 정부가 출연연 관리·감독을 강화했으며 과학기술 및 그 집단의 사회적 위상이 낮아졌고, 두뇌 유출 및 행정 기관들 사이의 마찰 급증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그 이후 시기를 평가하고 있다.

박진희의 이러한 암시적인 평가는 문만용(2008)의 논문과 비교하면 더욱 극명해진다. 특히 70년대 말 출연연의 통폐합 논의에 대해 박진희는 기술 보호주의가 강화됨으로써 제5공화국 정부는 이러한 기술 개발의 어려움을 출연연에 대한 정부 관리·감독의 강화로 타개하려 했다고 분석한다. 반면 문만용은 1976년 전후로 연구기관이 한꺼번에 설립되는 상황은 재원확보의 어려움과 기능의 중복 등 다소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과학기술처에서 연구소들을 통폐합하여 관리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고 지적한다. , 정부가 바뀌기 전 이미 출연연 제도 남발의 문제점이 불거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60, 70년대 출연연 제도가 국가의 경제 성장과 과학기술에 대한 중요성 인식 등에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만용의 지적처럼 그것의 과()도 무시할 수 없다. 공과(功過) 모두를 주목해야지만 우리는 당시의 과학기술, 특히 정부출연제도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논문과 KIST 기념사 같은 글의 큰 차이는 무엇일까? 역사학자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자이다. 내가 연구하는 과거와 지금의 문제의식을 어떤 각도에서 조명할 것인가를 주목한다. 과거를 과거의 맥락 속에서 잘 분석하되, 우리의 삶에 어떻나 통찰을 전해주는가 고민한다. 사료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점들을 연결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역사가들의 숙련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림 그리는 방식을 보면 역사가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만약 KIST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두 저자는 똑같이 던지고 있다. 하지만 질문을 명시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부고속도로를 예로 살펴보자. 기술의 특성은 기술을 만든 이후 수요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세우니까 수요가 생기고, 따라서 지지자들은 그것을 근거로 옹호한다. 인천공항도 똑같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1안: 인천에 대규모 공항을 짓자. 2안: 국제 공항을 분산시키자. 둘 중 1안 선택. 지으니까 수요가 생기고 운영이 잘 됨. 그리고 로컬한 공항들이 다 망함. 지지자: 잘 됐잖아! 분산되었으면 큰일날 뻔했네! 분산 지지자들: 안 짓고 분산했으면 훨씬 더 균형 있게 발전했을 걸? 수도권 편중! 이 두 의견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역사적 감수성sensitivity이다.

출연연의 가장 큰 문제는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가장 좋은 기초 연구는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응용 연구는 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출연연은? 현대 한국과학기술사회의 상당히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예산이 매해 엄청 들어가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출연연은 골칫거리. 성공 스토리를 걷어 내고 난 다음을 보자. 출연연의 문제는 그 씨앗에서부터 볼 수 있을 것이다. => 문만용: KIST에 대한 평가 없이 출연연이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 그 이후 기초연구는 대학, 응용연구는 기업에서 이루어졌다. 외국 기술을 받아서 국내 기업에 매개해주는 KIST의 역할을 쓸모없어졌다. 전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어떻게 보면 KIST를 설립하자는 박정희의 선택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평가를 전혀 하지 않고 분화 확장을 한 것은 잘못이라 볼 수 있다.

내가 박진희 선생님 글을 완전히 잘못 읽었구나...


5. Dong-Won Kim and Stuart W. Leslie, “Winning Markets or Winning Nobel Prizes?: KAIST and the Challenge of Late Industrialization,” Osiris 13 (1998), 154-185.

KimLeslie(1998)KIST, KAIST의 설립 과정을 살피면서 그 기관들이 산업개발연구과 노벨상 수상 사이의 간극을 메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저자는 KIST를 중심으로 하여 제도적인 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주된 이유를 서로 다른 두 선생, 즉 일본과 미국에게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찾는다는 점이 인상 깊다. 한국은 서로 매우 다른 과학기술의 전통을 섞어서 발전 초기에 각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이 그렇게 제도적인 혁명을 이루며 세웠던 KIST의 정체성은 기초연구기관이 아니라 외국 기술을 국내 산업으로 옮겨오는 창구 역할이었다. 따라서 설립 계획에는 노벨상 수상이라는 목표 자체가 들어 있지 않았다.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뒤이어 설립된 KAIS 또한 연구개발을 통한 경제성장이 주된 목표였다.

그러나 기업들이 스스로 R&D를 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다른 대학들도 점차 산업계와 협력을 맺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KAIST는 그래도 다른 대학과 차별성 있는 대학이 될 것인지 물음을 던지며, 당시의 관련자들이 산업개발연구와 노벨상 수상 사이의 긴장을 인식하며 KAIST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노력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꽤 긍정적이다. MITStanford 같은 대학들 또한 연구개발와 노벨상의 수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근거는 과연 타당할까? 지금 이에 대해 정당하게 반박할 수는 없지만 MITStandford 대학의 맥락과 한국의 KAIST의 맥락은 꽤나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한다. 둘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아니면 굳이 메울 필요가 있는 것일까?


Leslie는 스탠포드와 MIT를 비교연구한 바 있다. MIT는 군사 연구의 산실. 스탠포드는 기업에서 후원을 받아 연구소를 세워 학교가 커졌다. 그 근원은 30년대 물리학과. 터먼이 진공관 연구를 한 이래,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 사이의 협력이 이후 산업체와의 연계에서 비슷한 일로 반복되었다. 이러한 노력에서 spin-off 기업이 발생. 터먼이 스탠포드의 교무처장이 되면서 제도 개혁을 통해 3-4위까지 끌어 올렸다. 그는 이 성공 신화를 제3세계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카이스트에도 관심이 많았다. Leslie는 스탠포드의 모델이 외국으로 건너 간 경우를 발견. 그중 하나가 한국이다.


6. 강기천, “한국 과학재단의 설립과 대학의 기초 연구, 1962-1989”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강기천(2014)은 한국과학재단의 사업을 정부의 기초 연구에 대한 인식 변화를 반영하여 대학에서의 기초연구의 성격을 결정짓는 일종의 매개체로 보고 있다. 설립 초기인 1970년대에는 정부가 기초연구를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대학을 인식하고 한국과학재단을 통해 비교적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균형 있게 지원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을 연구기관으로 인식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목표에 부합하는 응용연구 및 개발에 선행하는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식으로 그 기조를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학의 역할 변화는 정부가 기초연구를 규정하는 방식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학이 기초연구를 통해 인재를 육성하고 더 나아가 응용 및 개발연구를 수행하는 곳이고, 따라서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자연스러운 생각이 한국의 경우 정부 정책의 기조에 의해 확고하게 구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중화학공업화 정책 추진에 의해 불어난 고급 인력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기초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당시 대학의 낙후 문제와 미국과의 협력으로 인해 대학이 투자 대상의 하나로 인식되고 덩달아 대학의 연구는 곧 기초(과학)연구라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한국과학재단의 설립이 기초연구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대학과 기초연구의 관계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보고 있다.

이후 1980년대 이후 정부는 장기적으로 새로운 기술의 원천을 만들고 단기적으로 기술 쇼크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역시 이러한 강조는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함께 했다. ‘기초연구의 개념은 확장·분화하면서 실용적인 연구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학재단 내에 목적기초연구비가 만들어졌고 정부가 스스로 과학기술 과제를 도출하고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방식에까지 이르렀다. 저자는 이러한 변모가 1990년대 이후 한국 대학이 수행하는 연구가 응용과학 및 공학을 중심으로 흐를 것을 예고했다고 본다.

1986년 목적기초연구비 지원 사업의 등장 이후 특정목적기초연구와 일반목적기초연구가 모두 기초연구라는 항목에 포함되어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큰 변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초연구 투자 비율이 올라갔다는 저자의 지적 또한 흥미롭다. 오늘날은 어떨까? 한국과학재단은 현재 한국학술진흥재단(1981년 설립),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2004년 설립)과 하나로 통합되어 한국연구재단(NRF)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20167,680억 원에서 20178,866억 원으로 기초연구지원을 지속 확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지원의 지속 확대는 기초과학연구에 대한 것일까 기초연구에 대한 것일까? 오늘날 정부는 기초연구를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을까?